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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상철 Jun 11. 2019

한 번이라도 ‘도마’처럼 견뎌봤을까

 난도질, 베임, 상처투성이 밑바닥 삶의 진정한 극복

요리에 있어 도마는 칼과 함께 가는 친구다. 도마는 칼이 있어야 외롭지 않고, 칼은 도마 때문에 든든하다. 도마는 식재료의 역사다. 어떤 재료도 도마를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 채소, 야채, 생선, 고기, 각종 양념재료들과 심지어 견과류들도 올라와 자신의 출처를 밝힌다.

어릴 적 도마 칼질 소리는 엄마의 신호였다. 처마의 빗소리가 심쿵하게 했다면, 도마 소리는 아침 원기를 채워주었다. 아침 엄마의 도마 소리는 집밥의 알람이었다. 늦게서야 요리를 하면서 칼질을 배웠고, 도마 소리를 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내가 도마 소리의 향유자가 돼버렸지만.

도마는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해서 ‘도마’다. 도마는 처참한 전쟁터다. 어떤 것도 제 모양을 유지할 수 없다. 생선은 뼈와 살이 분리돼야 하고, 고기는 갈기갈기 찢겨야 한다. 예쁜 사과도, 통통한 당근도, 아삭한 샐러리도 토막 나고 잘려나간다. 생선 내장이라도 튀는 날이면 각오해야 한다.

그런 도마가 이젠 미를 뽐내기도 한다. 플레이팅 도마가 대세가 됐다. 인스타그램이 그 대열에 불을 지폈다. 어떤 도마는 플레이팅 역할만을 위해 태어난 것도 있다. 도마로서 본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도마는 위생이 생명인데, 항균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도마에 올라오는 것은 요리 영역만이 아니다. 무수한 사람들도 도마에 올랐다. 첫 번째가 정치인들이다. 당파싸움만 하다 보니 정치 본연의 역할을 하지 못한 탓이다. 직장에서는 상사에 대한 불만이 도마에 오른다. 최근에는 재벌 갑질을 두고 언론과 인터넷, sns상에서도 도마에 오르기 일쑤다.


도마는 가끔은 층간 소음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내가 요리에 재미를 붙이면서 한밤중에 요리를 할 때도 있었다. 도마 소리는 주변이 조용할 때 더 크게 나는 법이다. 특히 유리 도마는 소음의 대마왕이다. 쇠와 유리가 만났으니 오죽하겠는가. 그래도 도마라고 자신은 우긴다.

한식 요리는 썰기도 하지만 다지는 경우가 많아 도마가 두꺼울 필요가 있다. 대개 나무를 10㎝ 정도 두껍게 켜 넓게 만들거나 굵은 통나무를 잘라 평면 부분을 사용해 왔다. 요즘은 재료가 좋아 얇고 작은 도마와 플라스틱 등 합성수지로 만든 도마도 널리 사용되는 추세다.

나무 도마는 칼자국에 세균이 잘 번식하므로 자주 건조해주어야 한다. 생선 비린내가 심할 때는 녹차를 우려낸 뜨거운 물로 소독하면 좋다. 도마는 육류용, 생선용으로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이 가장 좋다. 식초물에 도마를 담그고 한나절 정도 둔 후 뜨거운 물로 헹궈서 소독해도 좋다.


도마를 쓰다 보면 가끔씩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하나의 도마로 고기나 채소, 과일, 생선 등 모든 식재료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게 건강에 괜찮은 건지 스스로 되묻기도 한다. 생고기나 날생선에는 대장균이 있어 도마를 따로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런 세균은 도마를 씻어도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나무 도마를 세척할 때는 베이킹소다나 레몬즙으로 문질러서 세척하는 것이 좋다. 또 나무 도마는 올리브 오일로 표면을 문지르면 더욱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유리로 된 도마는 칼날을 쉽게 무디게 할 수 있고, 미니 도마는 식재료가 도마 밖으로 나가 오히려 오염에 노출될 수도 있다.

플레이팅 원목 도마는 수종, 사이즈에 따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다. 편백, 캄포나무, 소나무 등 소프트우드는 항균성이 좋다. 월넛, 애쉬, 오크 등 하드우드는 항균성 물질이 거의 없기 때문에 칼도마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다. 하드우드의 도마는 플레이팅용으로 쓰인다.




빵이나 치즈가 올라가 있는 플레이팅 도마는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럼에도 도마는 본연의 역할이 있다. 자신이 매 순간 파이고 무수히 상처를 입어도, 주인의 미각을 살리고 생존을 지키는 그 역할이다. 독한 이물질로부터의 감염, 격한 부패와 무제한 난타를 견딘 희생의 산 증인이 바로 도마다.


나는 단 한 번, 한 순간이라도 도마처럼 밑바닥에서 난도질당하고 두드려 맞고 베어가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본연의 역할을 해낸 적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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