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보다 치밀한 상상 속 세계

주인공이라는 생명이 살아가는 세상

by 라솔




희미한 세계가 선명해지는 기적




상상 속 세계를 이야기로 실현화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물이 살아갈 세상을 철저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세계관을 설계한다고 하면 십중팔구는 모두 판타지를 생각한다. 상상이라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뿌연 안개 뒤의 세계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뭐, 그도 그럴 것이 써보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그럴 수 있다. 라솔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학부모들의 대부분도 그렇다.

"아이가 이야기를 쓰고 싶어 하는데 이런저런 생각들만 머릿속에 가득하고 펼치는 걸 어려워해요."

"어려운 건 당연해요. 어머님은 머릿속이 복잡할 때 어떻게 하세요?"

"글쎄요."

"좋은 팁을 알려드릴게요. 종이와 펜이 있다면 더 좋겠지만 없으시다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들을 무조선 직접 적어보는 거예요. 그냥, 막 나열하세요. 그리고 가장 고민의 무게가 큰 것이거나 먼저 해야 할 일들을 다시 적는 거예요. 그러면 희미했던 생각이 선명해져요. 사실, 이미 알고 계신 거죠?"

그러면 어느 순간 부모님들은 그 쉬운 걸 왜 여태껏 잊고 살았나 싶은 표정으로 작은 탄성을 내뱉는다.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설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은 머릿속 떠오르는 희미한 것들을 하나하나

아이디어 노트에 무작정 나열하며 시작한다. 그러고 나면 희미했던 생각들이 선명하게 글로 보인다.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내 주인공이 살아갈 세상을 구체화시키는 단계에 돌입한다.





각자의 우주를 가진 아이들




작가에게 주인공은 하나의 우주다. 아이들은 새로운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매번 또 다른 우주를 만난다.

그 우주가 안갯속에 가려지지 않고 선명해지도록 돕는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역할이다.

얼마 전 완성된 '오레진이 녹는 순간'이라는 작품 속 세계관은 과자들이 선택을 기다리는 마트가 배경이 된다. 모두가 선택을 기다릴 때 유일하게 선택받기를 원하지 않고 도도하기 그지없는 오레오 과자가 주인공이다.

그들의 세계관은 굉장히 현실에 가까워서 이야기를 읽는 내내 지금 이 순간에도 마트에 진열된 수많은 과자들이 조잘조잘 떠들 것 같은 상상이 현실처럼 느껴진다.

처음 작가와 세계관을 설계할 때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각각 등장하는 조력자들까지 모두 현실적인 특징을 고려해서 배경의 특수성을 가지고 왔다. 마트, 베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거실은 하나같이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다. 이 장소들과 실제 과자들의 특성이 의인화라는 판타지와 만나 있을 법한 세계를 완성시킨 것이다. 바삭한 과자 사이에 부드럽고 달콤한 크림이 발린 오레오는 원하지 않는 선택을 받게 되고 함께 담겨온 과자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더운 여름날 베란다는 달아오르고 결국 크림이 녹기 시작한 '오레진'은 위기에 빠진다. '오레진'을 구하기 위한 눈물겨운 사투가 시작되고 과정 속에서 작가의 세계관이 완성된다. 어떤 결말을 향해갈지는 온전하게 작가의 몫이다. 오레진을 구할지 버릴지는 작가가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의 기준이 도덕적이든 그렇지 않든 어디까지나 지금 작가의 세계를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지난 후에 자신의 결말을 조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선생이랍시고 먼저 너무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고 선택을 좁혀버리면 방향성을 조정할 수 있는 아이들의 중요한 순간을 빼앗는 꼴이 된다. 결국, 창작의 세계에서 판단보다 중요한 건 나아가고 되돌아보는 탐색이니까.





상상 속 세계는 현실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실 이 이야기를 쓰기 전, 처음 만났던 꼬마 작가와 이야기를 완성한 후의 작가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론 나는 작가 안에 꼬물거렸던 힘이 내면을 뚫고 나왔을 거라고 믿는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말이다.)

아주 많이 수줍어하던 아이였는데 자신 안에 있던 재미있고 엉뚱한 기질이 창작이라는 통로를 만나 세상밖으로 나오게 된 경우였다. 첫 이야기가 작은 소책자로 만들어졌을 때 손에 들고는 눈을 떼지 못하고 반짝반짝 눈을 굴리던 날을 잊을 수 없다. 어린 친구들은 습작 종이에 일일이 손글씨고 이야기를 채우는데 그 글이 책의 꼴을 갖추고 자신의 품의 안길 때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을 느낀다. 그렇게 소중한 이야기를 품에 안아본 아이들은 그다음 세계를 만날 때 더 진지할 수밖에 없다. 어떤 부모님은 가족들 혹은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작가와의 만남' 시간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얼마나 귀한 응원의 시간인지 모른다.

이렇게 어렴풋한 세계가 하나하나 안개를 거둬내고 선명해지는 순간을 경험한 아이들은 또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있다. 치밀한 과자들의 세계가 결국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감각을 끌어올려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은 주인공들이 살아갈 배경을 철저하게 궁리할 때 얻을 수 있는 희열의 끝이 된다.

상상이 창작을 만났을 때, 현실을 깊이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연습의 장이 된다.

지금도 라솔서재의 아이들은 마음껏 넘어지며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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