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풋이 있어야 아웃풋이 있다고 믿는 혹자들에게
선생님, 저희 아이는 책을 안 보는데 글을 쓸 수 있나요?
라솔서재의 문들 두드리는 부모님들의 하소연이다. 자녀가 글을 좀 썼으면 좋겠는데 책도 안 읽는 아이가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서는 거다. 보통 우리는 많이 읽어야만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적인 진리는 아니다. 적어도 창작의 영역은 더욱 그렇다.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가 달린 전업 작가가 아니라면 더더욱이 읽기의 방대함에 압도 당해 글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대로라면 우리는 엄청난 양의 책을 읽기 전에는 단 한 글자도 쓸 수 없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창작이야말로 낮은 문턱을 폴짝 넘어 그 너머의 세계를 맞볼 수 있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다. 인간은 한번 맞보고 즐거움을 느낀 세계는 무슨 일이 있어도 탐닉하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창작을 통해 글쓰는 보람과 의미를 경험한 아이들은 더 높은 글쓰기 문턱이 앞을 막아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넘어가려고 할 것이다. 그 너머의 즐거움을 맛보기 위해서. 보통 게임에도 첫 레벨은 정말이지 내가 뭘 했나 싶을 정도로 쉽게 성공의 경험을 하도록 이끌면서 다음 단계에 도전하도록 프로그래밍 한다. 하물며 게임도 그토록 친절하게 사용자를 배려하는데 글을 쓰는 아이로 키우고 싶다고 하는 부모가 아이들을 무작정 황무지로 내몰아버리는 경우를 종종 본다.
상상의 바다 그 무한함에 빠뜨려라!
"선생님, 화채가 되고 싶은 수박이야기를 쓸거예요!"
2학년 아이가 대뜸 던진 말이이었다. 이럴 때 마다 나는 환호를 지른다. 정말 멋진 생각이지 않은가!
화채가 되고 싶은 수박이라니! 이쯤되면 과연 이 이야기를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할거다.
그 후로 수박이는 빨간 과육을 만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유산소 운동을 위해 런닝은 기본이고 근육을 기르기 위해 열심히 웨이트 트레이닝을 한다. 그렇게 열심히 신체를 달련한 끝에 결전의 당도체크 날이 다가오고 특등급 합격을 받는다. 톡톡쏘는 향긋한 탄산과 부드러운 우유 속에 과육을 동동 띄운 채 행복해 하는 수박이의 표정을 상상하자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아이들은 경계가 없다. 수박의 당도를 소재로 친환경 농법에 대한 주장하는 글 혹은 논설문을 쓰라고 한다면 근거를 찾아야 하는 문턱을 한 단계 먼저 넘어야 하고 그 다음 그 근거가 사실인질를 확인 해야하고 그 다음에 직접적으로 글에 적용해 자신의 생각을 펼칠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이 어린 아이들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단계다. 하지만 창작은 다르다. 상상의 바다에서 건저 올리는 모든 것은 '스토리'라는 그물에 걸려 만선을 경험하게 된다. 그 그물이 작아도 좋고 커도 좋다. 촘촘하면 촘촘한 대로 아주 작은 물고기 까지 건질 수 있고 느슨하면 느슨한대로 그것에 맞는 것을 건질 수 있다. 이렇게 즐거움의 영역으로 글쓰기를 시작한 아이들은 쓰는 행위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쓰는 행위는 모두의 전유물이다. 그리는 것이 그렇듯이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간섭없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구마구 끌어 올리도록 지켜 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쓰다보니 보이는 이야기
"저, 요즘에 이야기 책이 재밌어요."
어느 날 세 편정도 이야기를 쓰고 있던 아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툭 말을 던쳤다.
"정말? 무슨 책이 재밌어?"
"삐삐요."
"선생님도 가장 좋아하는 이야긴데. 뭐가 그렇게 재밌었어?"
참고로, 이 친구는 스토리라면 머리를 흔들던 친구였다. 읽는 책은 오로지 자연과학과 관련된 잡지 형식의 책들 뿐이였다.
"삐삐는 무서운게 없어요. 하고 싶은 거 다해서 좋겠어요."
"삐삐의 마음이 느껴졌어?"
"그럼요. 다음 이야기는 삐삐처럼 하고 싶은 거 마음대로 실컷하는 주인공을 만들 거예요."
스토리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며 근심이 한가득이었던 아이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토리를 무턱대고 읽는다고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물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작가로 참여해서 직접 만들어 보는 즐거움을 느낀 후에야 느낄 수 있는 진한 감정이다. 이미 만들어진 이야기에 스며들기 어렵다면 내 마음대로 주인공을 만들어 보는 것도 좋은 시작이다. 이 작업이 책 속에 인물을 이해하는 것 뿐이겠는가? 나를 이해하고 내 앞에 있는 너를 이해하는, 깊은 공감의 출발이 된다는 것을 아이들을 보며 확신하고 있다.
'라솔서재'에는 벌써 한 바구니 가득 이야기 열매가 담겨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바구니를 채워나갈 생각에 늘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