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들켜버린 내 마음
일기의 함정, 진짜 비밀은 쓸 수가 없어요!
어느 날 한 친구가 나에게 뜬금없이 이런 말을 했다.
"선생님, 저 이제 일기 잘 써요."
"그래? 전에는 힘들었어?"
"네, 검사는 받아야 되는데. 맨날 똑같잖아요. 막 일기장이 잡아먹는 거 같아요. 무서워요."
"그런데, 지금은 할 말이 많아졌어?"
"네. 이제는 일기 쓰는 거 안 무서워요."
"대단한데?"
"라솔 다니면서 글쓰기가 재밌어졌어요. 이제는 막 할 말이 생각나요."
이제 노트 한 바닥은 거뜬하다며 생글생글 웃는 3학년 여자 친구였다.
물론 이 친구도 창작이 쉽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민하고 힘들어할 때 아무렇지 않은 척 묵묵히 옆에서 지지해 주고 응원했다. 때로 이야기가 풀리지 않는 순간에는 슬렁슬렁 다른 이야기 책을 보면서 환기를 한다. 그러면 또 자연스럽게 내 이야기를 이어갈 무언가가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아이들이 일기 쓰기를 힘들어하는 건 검열자가 있기 때문이다. 감시받는 느낌이지 않을까?
그리고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이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은 것도 한몫한다. 우리는 일기를 자아 성찰의 통로로 생각한다. 뭐, 틀린 방향은 아니지만 어른도 힘든 작업인데 하물며 어린아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 '무슨 아이들 일기가 자아성찰씩이나 합니까?' 싶다면 하루의 일과를 나열하는 것이 고작일 일기라고 생각한다는 의미일 텐데, 그렇다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다른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 꼭 일기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창작은 비밀을 숨기기에 아주 적합한 통로다. 그렇게 내 비밀을 주인공과 사건에 녹여내면서 희열을 느낀다.
이 과정이 아이들로 하여금 글을 쓰는 재미를 느끼게 하고 문장을 거침없이 쓰게 하는 힘을 준다. 그 후부터는 일상도 그냥 보이지 않는다. 이 힘이 결국 하루를 다르게 보는 힘을 기르게 하고 일기를 마음껏 내 이야기로 채울 수 있는 자신감으로 이어지게 한다.
오롯이 나에게 몰입하는 시간
창작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따닥, 따닥.' 거리는 연필소리가 라솔 서재를 가득 채우기 시작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작에 몰입하는 아이들은 눈빛부터 달라진다. 언제 까불며 장난을 쳤냐는 듯 한결 같이 주인공과 함께 성장한다. 다른 세계에 가 닿은 아주 특별한 존재들을 마주하는 느낌이란, 마치 라솔서재가 하나의 우주가 되어 반짝이는 행성들을 위해 더 숨을 죽이고 조도를 낮추는 것 같다.
마법의 공간처럼 연필로 쓰고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가 문장의 열매가 되어 여기저기에 걸터앉아 숨을 쉰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그 문장들에 귀를 기울여 본다. 문장은 슬프기도, 행복하기도, 지루하기도 하다. 이것들이 뒤섞이면서 아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생각과 마음을 키우는 것이다.
참 재밌는 건 글에 몰입한 순간에 나타나는 습관도 다양하는 것이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는 아이, 다리를 달달달 떨면서 쓰는 아이, 미간에 힘을 빡 주고 있는 아이, 안경이 코끝까지 흘러내린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야기 창작은 작가가 주체가 되는 작업이다. 그러니 자신의 이야기의 주인이 자신이 되는 순간을 몰입으로 경험하는 일은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재밌게 쓰는 글
누군가에게 검사를 받기 위해 억지 하루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며 꾸역꾸역 쓰는 일기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이야기 창작이다. 자신이 쓰는 글의 주인이 바로 '나'라는 것을 깨닫고 책임져가는 몰입의 과정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보통 즐거운 일을 하면 빠져든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
라솔서재에서 글을 쓰는 아이들은 한결같이 '벌써 시간이 다 됐어요?'라며 자신도 놀란다. 한 시간 반이 훌쩍 넘는 시간을 집중해서 쓰는 동안 재밌지 않고 서야 어찌 쓰겠나. 그렇게 채워진 글을 보면서 뿌듯하기도 하고 남은 시간 동안 주인공 이야기에 웃음꽃을 피운다. 아이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은 이미 살아서 우리의 친구가 되기도 속을 시끄럽게 하는 빌런이 되기도 한다. 창작으로 몰입하는 아이들은 늘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난다. 이토록 즐거운 글쓰기는 언제나 내 마음을 쏟아 놓을 너무나 훌륭한 친구가 되어 준다.
오늘도 <라솔서재>는 아이들에게 진정한 친구와 만나는 공간이기에 다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