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다시 쓰게 하는 힘

견뎌낸 자만이 알 수 있는 만족감

by 라솔



첫 장을 채우는 게 가장 힘들어


얼개를 짤 때까지만 해도 신나게 조잘거리던 아이들도 막상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 여기저기서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어떤 아이는 두 차시 넘게 첫 장에 머물러 끙끙 앓기도 한다. 뾰로통해서 툭 튀어나온 입을 보고 있노라면 그 진지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난다.

"선생님, 이야기가 진행이 안 돼요. 아무 생각도 안 나요."

"괜찮아 너무 급하게 이야기를 끌어낼 필요 없어. 원래 첫 장을 채우는 게 가장 힘들어. 그것만 넘어가면 그다음부터는 쭉 쓸 수 있어."

"오늘 반 밖에 못썼는데도 돼요?"

"그럼, 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내내 고민했다는 게 중요하지. 이 고민을 가지고 다음 시간까지 주인공 상황을 더 생각해 보고 오자."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터덜터덜 라솔서재 문을 나서는 아이들을 보며 난 엄지척을 날려준다. 오늘도 충분히 고민하고 힘들었으니까.

글을 쓴다는 것은 당장 책상에 앉아서 쓰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야기가 생각과 마음에 내내 떠나지 않고 머무르는 것 또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이토록 끙끙이는 사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도무지 주인공의 마음을 헤아릴 방법이 없기에 난 묵묵 그 시간을 함께 지켜봐준다.

아이들은 일주일 동안 주인공이 직면한 문제를 함께 짊어지고 고민하며 산다.

그렇게 라솔서재로 다시 돌아오면 그때부터 주인공이 마구마구 쏟아내는 수다를 받아 적을 시간이다.

주인공과 단 둘이 마주한 시간 속에서 어느덧 한 장은 두 장으로 넘어가고 두 장은 세 장이 된다.


빠져드는 순간을 지나


"선생님! 한 장 더 주세요!"

한 손에 원고 종이를 번쩍 들고 흔들며 큰 소리로 외치는 아이들의 눈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이글거린다.

"세상에, 드디어 첫 장이 끝났구나!"

서랍에서 종이를 꺼내는 시간도 기다리기 힘든지 '빨리빨리'를 외치며 거들먹거릴 때는 세상을 다 갖은 표정이다. 첫 장이라는 불판 위에 오른 마른오징어처럼 쪼그라들었던 모습은 오간데 없다.

조금 큰 아이들은 직접 워드작업을 하는데, 깜빡거리는 커서와의 싸움을 이겨내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두 번째 페이지로 넘어가는 찰나에 글이 확장되면서 빠져드는 순간을 통과한다. 그때부터 페이지의 압박은 작가에게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야기는 놀랍게 스스로가 힘이 되어 작가를 끌어당긴다.

몰입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안 될 것 같은 상황을 오롯이 견디고 걸어간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달콤한 선물이다. 그렇다면 몰입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릴까?



마침표(.) 자기 효능감을 각인하는 하는 것


결말을 향해서 가는 아이들의 목소리는 처음 이야기를 상상하던 순간만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들떠있다.

선생님 눈에는 이야기를 끝내려면 아직도 한참 더 남았는데, 벌써부터 호들갑 떨며 자기 이야기가 다 끝나 간다며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런데 참 신기한 건 그렇게 끝을 보고 싶어서 안달복달하던 아이들도 막상 진짜로 결말을 앞두면, 다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빙빙 돌기 시작한다.

"은채야, 이제 그 정도 했으면 됐어. 마무리 하자."

"아니, 아니. 잠깐만요! 저 한 줄만, 한 줄만 더 쓸게요."

"뭘, 더 써? 괜찮아."

"아니, 한 줄 만요. 아, 그리고 앞에도 한 번 더 봐야 돼요."

그렇게 이야기를 끝내고 싶어 몇 달째 끙끙거리던 아이가 더 나은 이야기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낸다.

스토리와 함께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마침표를 찍은 날 은채는 환호를 질렀고 다음 이야기를 상상했다.

"선생님, 저 완전 천재인 거 같지 않아요? 저 다음에는......."

아이고야.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화면 커서 앞에서 만날 한숨을 푹푹 쉬던 아이는 아무리 찾아봐도 온간데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힘들게 쓰더니 바로 다음 이야기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좋냐?"

"그럼요! 힘든 건 힘든 거고 새 이야기는 새 이야기죠."

"아주 그냥, 또 힘들다고 징징거리기만 해 봐."

"또 그럴 건데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죠."

하늘을 찌를듯한 기세는 어디서 온 걸까? 늘 그것이 궁금했다. 오랜 시간 아이들과 글을 쓰며 깨달은 것은 바로 마침표였다. 한 번 이야기를 완성해 본 아이만이 느낄 수 있는 다른 색깔의 만족감. 이 것이 또 쓰게 만드는 힘이다. 쉽지 않은 시간을 견뎌내고 몰입하고, 그 끝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우리의 인생과 참으로 닮았다. 이 경험은 단지 이야기를 만드는 순간을 뛰어넘어 인생을 바라보는 자세가 되는 것이리라 확신하며 오늘도 인생을 배우는 아이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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