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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하 Oct 30. 2022

달콤함이 선셋인 줄도 모르고.

막을 내리러 갔다.

길리에서 돌아와 함께 살았다. 모든 걸 같이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언제나 ‘람’이 반겨주고 챙겨주었다. ‘람’은 휴가였으니까. 그런데 어느 날은 그 ‘느림’이 너무 싫었다. 빨리 출근해야 하는데 사랑을 받아주고 리액션해주는 일이 너무 숙제같이 여겨졌다. 게다가 ‘람’은 언제나 천천히여서 내 마음을 더 급하게 했다. ‘아침 먹고 갈래? 챙겨줄게’라는 말에 ‘아니 바빠’라고 답했는데 다시 ‘아침 먹고 가야 힘나지’라는 말에 화장품을 던져버렸다. 우리는 멀어졌다. 나는 바빠지면 폭력적인 사람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우리는 한 달 만에 멀어졌다. 더 가까워지는 형태의 다툼이 아니었다. 거리가 필요해서 거리를 두게 된 일이었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여사친이 발리에 와서 소개해주고 싶다던 애가 말도 없이 그 아이랑 놀다 오고, 파티를 다녀와 수영복을 정리하곤 했다. 그 무렵 나는 수업뿐만 아니라 촬영 제안, 개인 레슨 같은 일들이 들어오던 시기여서 매우 바빴고 마음에 여유가 없었다. 마침 코로나가 터졌다. 엄마는 계속 들어오라고 하셨다. ‘람’은 나랑 코로나에 대해 상의하기보다 여사친이랑 더 많은 상의를 했다. 달콤했던 관계만큼 속상했다. 머리에 안 나던 여드름이 빼곡히 났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엄마가 준 비행기 티켓을 덥석 물고 발리를 떠나기로 했다. 도망갈 때는 최대한 빨리, 상처받지 않도록. 3일 전에 결정, 당일 통보했다. 착하고 느린 람은 화를 내지 않았다.  람은 가만히 눈을 감고 한참을 숨을 쉬었다. 그리고 꼭 안아주었다.


‘람’을 만나서 발리를 더 진하게 느꼈고 바빴던 생활과 겹쳐 람의 다정함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내가 미웠다. 그리고 나한테 구체적으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한 번도 하지 않은 람이 미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싸웠던 날 밤마다 알로에 화분, 길가의 꽃, 직접 만든 치아시드 푸딩 등으로 내게 사과를 건네었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사과는 충분했다. 나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기 때문에 변명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란 것도 알았다. 다만 변명은 좀 해도 좋을 일인데. 사람이 너무 착하니 어쩌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돌이켜 생각해보았을 때 정말 미안한 건 나 스스로에게 미안했다. 일들에 다시 나를 매몰시켜버린 나에게 스스로에게 참 미안했다.


람 덕분에 더 진한 발리를 느꼈고, 사랑에 대한 욕구도 일에 대한 욕망도 더 뚜렷이 보았으며, 바쁨 속에서는 욕망을 바람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님 욕망의 전차 위에 탈 수밖에 없음도 알게 되었다. 정말 느리고 느리지만 자기 속도로 가는 람이 덕분에 많이 아팠고 한편으론 나를 잃을 것 같은 순간 떠올리며 힘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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