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아
호모 리그렉투스
영어가 또 내 발목을 잡는다. 25년째 창창한 내 앞길을 막고 있는데도 해결을 못하고 있다. 아니 이렇게 불편하면 개선을 해야 사람 아닌가? 막연하게 '영어 잘하고 싶다' 생각만 하다, 어느 결정적인 순간에 "땡" 당신은 영어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일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라는 탈락 메시지가 영어에 목이 매인 25년을 헛되게 만든다. 아니 헛된 것도 아니지. 내가 그만큼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는가. 반성과 반성, 그리고 다짐을 몇 년이나 반복했던가. 잘하고 싶다는 바람만 가지고 또 이렇게 올해가 지나갔다.
※ 주의: 이 이야기는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 외치면서도 왜 영어를 아직까지도 못하는가에 대한 '변명'과 '핑계'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공교육으로 영어를 배운 6차 교육과정의 첫 세대이다. 세계화에 발맞춰 '중학생은 이미 늦었다. 초등학생부터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시대적 요구가 있었고 평범한 가정의 초등학생인 나에게도 영어의 압박이 그늘지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첫 돌이 지나고 옹아리를 시작할 때부터 A, B, C, D 알파벳 노래를 배우고, 영어유치원에서 외국인 선생님과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영어를 받아들이는 게 당연하지만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초등학생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에 다니는 케이스는 흔치 않았다. (물론 내가 자란 동네만 그랬을 수도!)
하루 종일 house, mother 영어 기초 단어들을 알파벳으로 외웠다. 에이치오유에스이! 하우스! 집! 이렇게 단어 하나를 외우면 뿌듯해서 엄마한테 달려가 엄마 나 이 단어 영어로 할 줄 안다! 하면서 또다시 에이치오유에스이! 하우스! 집! 을 반복했었지. 영어 공부에 회화라는 개념이 없었다. 나에게 영어는 단어를 많이 외우는 것이었고, 당시 선풍적 인기를 끌던 <우선순위 영단어>에 나온 단어를 다 외우면 영어를 잘하게 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중학교,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단어가 문장이라는 것으로 확대되었을 뿐. 물론 언어 공부라는 게 일종의 암기이기 때문에 이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보긴 어렵다. 다만 이 영어 공부란 것을 왜 해야 되는지 몰랐다. 오직 시험만 잘 보면 됐었지.
그렇다고 시험용 영어를 완벽히 잘했던 것도 아니다. 수능 영어 성적은 2등급.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그 정도 점수. 삶이라는 게 무의미하고 지루해 죽겠는, 약간은 뻔한 사춘기 소녀에게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이 영어 점수로 내가 원하는 적당한 대학에 별생각 없이 무사히 입학해 별생각 없이 대학을 다니던 중, 내 인생에 영어가 중요해진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나를 영어의 굴레로 빠뜨린 건 바로 첫 해외여행. (정확하게 나의 첫 해외여행은 초등학교 6학년 걸스카웃에서 백두산을 가기 위한 간 단체 중국 여행이었지만 정말 하나도 기억에 남는 게 없기 때문에 나의 첫 해외여행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엄마, 아빠 죄송합니다. 없는 살림에 보내주셨는데...)
나의 첫 해외여행지는 '인도'다. 2007년 ~ 2008년 즈음 인도 여행 열풍이 불었다. 류시화 시인의 '지구별 여행자'를 시작으로 인도에 대한 환상이 대한민국 청년들을 뒤덮고 있었지. 인도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유럽, 동남아, 일본 여행과는 비교가 안된다며 인도 여행이 '진짜 배낭여행'이라고 주장했다. 언제나 진정성을 중시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란 나는 그 '진짜 여행'을 경험하고 싶었고, 때마침 인도 여행을 가자는 친구의 말에 주저 없이 OK 했다.
참고로 우리 엄마는 내가 무언가를 좋아한다고 할 때마다 내가 그걸 진정으로 좋아하는지 되물었다. 예를 들면 나는 과일이 좋아! 라고 이야기한다면, 엄마는 네가 진정으로 과일을 좋아한다면 맛없는 과일까지 좋아해야 한다. 너는 맛있는 과일만 좋아하니 진정으로 과일을 좋아하는 게 아니다 라는 답변을 하는 분이다. 그렇기에 '진짜 여행'인 인도 여행은 나를 강하게 이끌었다. 아무튼.
인도에서 마주한 세상은 정말 별천지였다. 하루를 꼬박 비행기에서 보낸 시간들은 물론, 공항에 내리자마자 코를 자극하는 이국적 냄새,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배경들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어버렸다. 이렇게 평생 여행을 하면서 살고 싶다 라는 마음이 들자, 드디어 나에게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올라왔다. 시험공부가 아닌 소통을 위한 수단으로써 영어가 나에게 필요해진 것이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집 앞에 있는 <삼육어학원>을 등록했다. 자발적으로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첫 순간. 두둥.
하지만 나의 의지력은 작고 귀여웠다. 팽팽 놀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 대학생에게 매일 아침 일어나 영어학원을 가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내 주변 친구들은 유독! 스펙 쌓기보다는 대학생의 낭만을 즐긴다며 밤새 술을 퍼마시던 부류였다. 나라고 달랐겠는가. 그 이후로 이곳저곳 영어 회화 학원을 헤매었지만 모두 다 흐지부지 끝나고야 말았다.
대학교 2학년 2학기를 마치자 여유가 있거나 영어를 배우겠다는 의지가 강한 친구들은 하나둘씩 어학연수나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던 상태였거든. 20살이 넘었는 데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몰랐던 가족 간의 관계, 고등학생 시절부터 계속된 우울감이 폭발하면서 나는 패배감에 듬뿍 절여졌어. 그래서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싫었던 것 같기도 해. 마침 갑자기 아빠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했고.
영어는 이제 다시 취업을 위해 필요한 것으로 돌아갔다. 토익스피킹, 오픽, 토익 점수를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이 상태에서 잘 될 턱이 있나. 토익 900점을 만들지 못하고, 오픽 IH 레벨을 만들지 못하고, 어영부영 작은 회사에 취업했다.
작은 회사지만 돈을 번다는 사실이 나에게 왠지 모를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내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건, 육체를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가난한 정신도 채워줄 수 있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내가 좋아하는 여행을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첫회사를 다니던 해의 연말, 일본을 갔다. 일을 그만두고 태국을 가고, 가족들과 대만도 갔다. 그리고 제대로 된 여름휴가를 받은 해,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캔 유 스픽 잉글리시"
"예..스, 벗 아이 캔트 스픽 잉글리시 웰"
여행을 다녀오자 다시 영어를 잘하고 싶은 욕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찾은 영어학원은 <제이 라이프 스쿨>, 나와 함께 몽골로 봉사활동을 갔던 친구가 다니던 영어 회화 학원이다. 이 친구가 학원을 다니면서 과제로 스피치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엄청나게 포스팅했던 게 마침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후 싱가포르에서 인턴 생활도 하고, 미국으로 대학원을 졸업해 터를 잡고 있으니 왠지 믿음직스럽지 않은가?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그 영어 학원을 찾아갔는데, 아니! 찾아보니 학원 대표님이 나의 대학 선배 남편 분 아닌가?! 진짜 사족인데 세상은 정말 좁다 좁아.
미국 애니메이션 <위 베어 베어스>를 보면서 듣기와 말하기 구문을 연습하는 수업을 신청했다. 수업이 꽤 재밌어 다른 기초반 수업도 추가로 신청해 들었었지.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그나마 꾸준히 다녔지만, 퇴근 후 구로에서 이대까지 가는 길이 어느 순간 버거워져 버렸다.
그다음 시작한 건 <캠블리>이다. 랜덤으로 정해진 외국인 선생님과 1:1 화상채팅을 하는 어플이다. 여기서 문제는 랜덤이다! 같은 선생님을 지정해서 공부할 수도 있지만 들쑥날쑥한 나의 일정 때문에 랜덤으로 정해진 선생님과 이야기하는 횟수가 많았다. 매일 다른 선생님과 이야기하다 보니 매일 내 소개를 해야 했고, 항상 쓰는 패턴의 인사만 쓰게 되더라. 캠블리는 3개월 수강 신청했으나 그마저 다 채우지 못하고 흐지부지 되었다. 캠블리를 쓰면서 나에 대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스테레오 타입의 서양인 대화할 때 (금발, 파란 눈, 하얀 피부) 유독 내가 떤다는 사실..! 정말 이유를 모르겠다. 어떤 편견인지 모르겠지만 나의 편견이 작용한 거겠지?
그렇게 영어 공부에 손을 놓고 있다가 나의 절친 민정이 영어 회화 선생님을 소개해줬다. 민정의 친구가 업체와 연계된 선생님과 친해서 1:1 커넥션을 뚫어놨단다. 100달러에 20분, 40회로 이루어진 수업이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영어 선생님의 유쾌함, 긍정 에너지에 홀라당 빠져버렸다. 한국 문화나 정치, 사회이슈도 나보다 더 많이 알고 계시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대화를 이어간다. 일주일에 3번, 꾸준히는 못하지만 벌써 1년이 다돼가는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최근엔 선생님이 나의 영어실력이 조금 늘었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선생님과 오랜 기간 영어로 대화를 하다 보니 영어로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사라졌고, 그 자신감에 외국계 회사를 턱턱 지원했다. 하하 두려움이 사라진 것 = 잘하는 것이 아닌데 말이야. 나의 착각. 결국 꼭 가고 싶었던 외국계 회사에서 최종 면접까지 갔다가 영어 때문에 채용이 어려울 것 같다는 메일을 받았지. (그날 맥주를 거하게 마셨다)
비록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지만 지금도 열심히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언젠가 올 기회를 또 놓치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그땐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았던 나의 과거를 후회하지 않길 바라며.
최근 우연히 아이돌 그룹 <아이들>의 멤버 전소연 님이 날린 명대사를 봤다. 하기 싫은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죠? 바로 빨리 해결하는 거예요! 역시 괜히 아이돌이 아니다. 나도 올해엔 25년 동안 끌고 온 나의 스트레스, 영어 공부를 빨리 끝내버리겠다! (또 다짐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