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호모 리그렉투스
다리에 멍이 사라질 날이 없다. 조심성이 없는 성격. 매일 마주치는 모서리에도 어김없이 무릎을 부딪힌다. 고양이도 아닌데 책상에 있는 물건들은 내 손만 닿으면 떨어지기 마련. 얼마 전에도 그랬다. 아마 혼자 살기 시작하고 벌써 3번째 컵을 깨뜨리던 날. 깨뜨린 물건을 치우는 데 어느정도 노하우가 쌓여 손으로 유리를 주섬주섬 줍다가. 앗. 결국 유리에 찔렀다. 아니 유리가 박혔다. 커다라 유리 조각을 자력으로 (정말 눈물이 펑펑) 빼내고 다음날 병원에 갔다. 분명히 내가 유리 조각을 빼냈는데 뭔가 이물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의사 선생님은 나의 상처를 바늘로 휘적휘적 거리더니, 이전도 봤는데 안나온 거 보면 아마 잘 빠져나온 것 같다. 그리고 유리는 살 안에서 썩지 않고, 왠만하면 알아서 살을 밀고 나오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그대로였다. 이물감은 사라지지 않고 상처난 부위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여전히 통증이 지속되는 날을 3개월이나 보내고서야 정형외과를 갔다. 사실 본능적으로 병원에 가야한다고는 느껴졌으나 귀차니즘이 괜찮다고 나를 꼬득였다.
"아니 왜 이제오셨어요"
보통 유리가 피부 표면에 얕게 박히게 되면 스스로 밀고 나올 수 있지만, 너무 깊게 박혀있어 자연 치유가 되지 못하는 상황. 다행히 유리라서 덧이 나거나 감염되지는 않지만 불편해서 어떻게 지냈냐고 의사가 물어보았다. 나는 멍청하게 그냥 기다렸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손을 베인 날 바로 치료 했으면 수술없이 유리를 꺼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살과 유리가 뒤엉켜 있어 상처부위를 절개하고 유리를 빼내야 한다고. 결국 두 바늘을 꼬맸다. 불편한 걸 견뎌내는 건 참을성이 있는 게 아니라 미련한 것이였지. 참는 게 미덕이라고 배웠는데 말이야.
참을수록 독이되는 건 치과 만한것이 없다.
시간은 손을 베인 날 부터 약 3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회사 건강검진의 마지막. 바로 치과 검진. 아랫니에 충치가 약간 있어 치료를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가격은 약 13만원. 일상 생활을 하는 데 딱히 불편한 점도 없는데 굳이 13만원을? 지금부터 양치를 더 꼼꼼히 한다면 충치가 이 상태로 유지될 거고. 그럼 딱 이 면적의 충치를 평생 안고 가도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정말 미신 같은 생각을 해냈다. 과거의 나 왜그랬지.
1년이 지나고 슬슬 치통이 시작되었다. 그 때 충치가 있다고 한 딱 그 자리. 하지만 치과를 가는 건 무섭다. 진료 받을 때의 고통도 무섭고, 가늠이 안되는 진료비도 무섭다. 후회 하기엔 늦었다. 두려움에 차일피일 치과 가기를 미루던 차. 이가 몽땅 빠져 버리는 꿈을 몇 번 꾼 후에야 치과를 찾았다. 충치는 내 맘처럼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충치가 있던 치아는 더 많이 섞어 신경 치료까지 해야했고, 옆에 붙어있는 치아까지 충치가 옮겨 갔다. 미루기로 인해 13만원으로 해결됐을 일이 60만원이 되는 매직. 그나마 때마침 코로나로 재난지원금이 나와 치과 진료비로 알차게 사용했다.
언제까지 미룰 것인가. 미룰 수록 행복해지지 않는데 말이야. 딴 짓을 하면서 애써 피하려고 해도 세상은 나를 빼고 돌아간다. 내 몸마저도 나를 빼고 늙어간다. 사실 이 글도 한 달 전에 쓰려고 했다.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응모를 하기 위해서는 10편의 글이 필요한다. 22년 10월 30일 오후 8시 30분. 제출 마감 시간을 약 3시간 반 남겨두고 있다.
<미루기의 천재> 라는 책이 있는 것 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일들을 미루고 있고, 미루는 일에 큰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겠지.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안도감. 물론 쉼을 위해 미루는 날도 필요하다. 하지만 나를 위해 오늘 해야만 하는 일들도 있다. 알잖아. 오늘 미뤄낸 일은 언젠가 제곱이 되어 나의 앞길을 가로막는 다는 거. 자 이제 넷플릭스는 끄고 할일을 해야할 때다. 오늘 만큼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제 시간에 출판 프로젝트에 응모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