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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효도여행 실패기

이렇게 하면 더 후회합니다.

동남아 효도 여행 실패기

호모 리그렉투스


무슨 이유였을까. 딱히 특별한 해도 아니었는데.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이서 베트남 여행을 가기로 했다. 부모님 생신도 아니었고, 축하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려 해도 도통 생각나지 않는다. 서른을 맞이해 부모님께 효도를 하고 싶었나. 아무튼 나는 엄마 아빠와의 해외여행을 결심했다. 


엄마는 평소에도 친구들과 패키지 여행을 자주 다녔다. 하지만 항상 여행에서 돌아오면 패키지 여행은 버스만 주구장창 타고, 우루루 왔다갔다 하다보면 남는 게 하나도 없다고 불평하곤 했다. 나 역시 패키지 여행은 지루하고 돈이 아까운 느낌이 들어 자신있게 자유여행을 가자고 이야기했다. 


베트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지만 혼자서 해외여행은 종종 다녔었고, 엄마아빠도 나이대에 비해 체력이 좋은 편이라 조금 고생스러워도 할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 이 여행은 내 인생 가장 힘겹고 눈물나는 여행이었다. 무려 5년이 지난 지금도 베트남 여행사진을 볼 때마다 여행의 행복감보다, 후회와 아쉬움이 너무 크. 부모님과의 효도여행에서 나와 같은 후회를 하는 분들이 없도록 그 후회의 기록을 남겨보고자한다. 


노점 과일가게에서 두리안과 망고를 샀다


6월, 한여름 우기에 동남아를 선택하다니!


2017년 이때만 해도 아빠가 사업을 하고 계셔서 긴 기간 휴가를 내기 어려웠다. 현충일과 주말을 껴 겨우겨우 만든 3박 4일, 가까운 동남아로 여행지를 잡았으나.... 6월의 동남아는 정말 조심해야 했다. 생각보다 더더 뜨거운 날씨, 뜨겁기만 하면 다행이게. 습기도 만만치 않아 "찜통더위"가 이런 거구나. 절로 실감했다.


평소 체력 하나는 자부했던 엄마아빠도 동남아의 더위 앞에선 무릎을 꿇었다. 하노이의 하롱베이라고 불리는 땀꼭투어. 그늘 하나 없는 뜨거운 햇빛 아래 모자 하나만 쓰고 30분 동안 보트를 타니 눈앞의 절경보다도 빨리 이 투어를 끝내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들었다. 


너무 더웠던 땀꼭투어

심지어 투어 장소까지 왕복 2시간을 달린 차 안에서도 미지근한 에어컨에 때문에 고생을 더했다. 숙소에서 먹는 맥주도 미지근하고, 바리바리 싸들고 간 쿨링팩과 핸디 선풍기도 동남아의 더위 앞에선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중저가 호텔을 선택하다니! 


부모님이 여행할 때 가장 신경 쓰지 않는 게 있다면 바로 숙소일 것이다. 국내에서 가족 여행을 다닐 때에도 숙소는 항상 나중 문제였고, 이상한 여관이나 텐트에서도 종종 잤다. 가족 모두 잠자리에 예민하지 않고 머리만 대면 시차 상관없이 잘 자는 편이다.  그래서 이번 숙소도 그리 비싸지 않은 (사실 가성비 있는) 호텔을 잡았다. 하 예약을 할 때 몰랐지. 이건 정말 큰 실수였다. 이곳은 베트남. 그리고 한여름. 숙소에 도착해 에어컨을 켜고 난 후에도 방이 시원해지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첫날은 고생하다 둘째 날부터 프런트에 우리가 도착하는 시간을 알려주고 1시간 전에 에어컨을 미리 켜놔달라고 부탁했다.


우리의 호텔 뷰. 더웠다.

이곳저곳에서 에어컨을 너무 많이 가동한 탓인지 호텔이 정전이 되었다. 방안의 더위도 더위지만 나는 그 시간에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낯선 땅에서 죽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다행히 엘리베이터가 무사히 1층에 도착했고, 바로 프런트에 가 따졌으나, 어쩔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내가 갇혀 그나마 다행이지 부모님이 갇혔다고 생각하면 더 암담하다. (하지만 2년이 뒤 러시아 가족 여행에서 엄마 아빠가 엘리베이터에 갇히고 말았다) 


동남아에서는 꽤 괜찮은 호텔을 골랐어야 했다. 적어도 이름은 들어본 호텔. 물론 한 여름이 아닌 때에 왔다면 달랐겠지만 여건 상 여름에 동남아로 휴가를 가야 하는 분들은 꼭 수영장이 있는 좋은 호텔 (이름을 들어본 호텔)을 가주세요.


비싼 마사지만 고집하다니!


엄마와 나는 서울 살 때도 종종 마사지를 받았다. 집 앞에 마사지 체인점인 "더풋샵"이 있어 몸이 찌뿌둥하거나 우울해질 때 마사지를 받곤 했다. 베트남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가 마사지다. 


저렴한 마사지도 좋지만 한국에서 받기 어려운 고급스러운 샵에서 마사지를 실컷 받아보고 싶었다. '효도여행'이니만큼 엄마가 한국에서 누리기 어려운 것들을 경험해드리고 싶었다. 깨끗한 베드 위 편안한 향과 정돈된 음악 속에서, 서로 수다를 떨지 않는 전문 마사지사에게 몸을 맡기는 행복.


그러나 여행에 돌아온 뒤 엄마는 친구들과 동남아 여행담을 나눌 때마다 "00은 마사지를 1만 원에 받았대, '현지 마사지'도 좋았다더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 엄마가 베트남 받은 비싼 마사지는 현지 마사지가 아니었다.


나는 깨달았다. 효도여행의 핵심은 좋은 곳을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행을 다녀온 이후 주변 사람들이 "거기서 00 했어?" 혹은 "00 먹어봤어?"라고 물어봤을 때, "당연하지, 그거 좋더라~" 하고 맞장구 칠 수 있는 경험을 주는 것이라는 걸.

유명한 맛집은 많이 다녔다. 한국에도 상륙한 콩카페
사람도 많아 정신없고 불친절했지만, 정말 맛 하나는 끝내줬던 분짜 맛집! 아빠가 정말 흡입하며 드셨다.
 매우 비싼 것 식당. 하지만 기억에 남진 않았다. 그런 것이다.


계획을 더 꼼꼼하게 세우지 않았다니!


나의  MBTI는 INFP다. 여행 계획을 세우지 않는 P. 해외여행을 가도 항공권과 입국한 날 + 이틀 정도의 숙소만 잡아놓는다. 맛집과 관광지, 하고 싶은 것들은 그냥 머릿속에 리스트업 해두고 그날그날 컨디션과 위치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인다. 


이런 나도 효도여행을 앞두고 '나름' 꼼꼼히 준비를 했다. 매일매일 갈 곳을 정하고 동선에 맞춰 점심과 저녁을 선정해 구글맵에 체크해놓았다. 무계획 여행을 즐기는 나에겐 이 정도는 정말 거창한 계획이었고, 구글맵만 있으면 천하무적일 줄 알았다. 예외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고 말이다.


둘째 날 가기로 한 땀꼭투어 패키지 티켓을 현지 여행사에 직접 찾아가 발급해야 했다. 숙소 근처였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구글맵을 아무리 돌려봐도 그 위치가 안 나오는 게 아닌가. 


똑같은 길을 3번 돌고나니 엄마도 아빠도 나도 모두 지쳐버렸다. 슬슬 불만의 목소리가 커지고 나 또한 예민해졌다. 어쨌든 무사히 티켓을 발급했지만, 여행 첫 단추부터 어그러진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여행사를 찾느라 고생하다 카페에 들렀다.

국내에서 유명한 여행사라 블로그나 카페 같은 데서 미리 위치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안일했다. 이렇게 필수적으로 꼭 가야하는 장소는 부모님과 갔을 때 헤매는 일이 없도록 미리 체크해 놓길 바란다. 혼자 여행에서 길을 헤맨 것은 여행 추억이 되지만, 효도 여행에서는 서로의 짜증을 불러오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효도 여행은 첫째도 계획, 둘째도 계획, 셋째도 계획, 꼼꼼할수록 세세할수록 좋다.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한다.


이 장소를 얼마나 많이 헤매었던가

엄마아빠에게 의지하지 않다니!


효도여행 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있다. 나 혼자 이 여행을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그래서 다들 '효도여행은 패키지'라고 말하는 거겠지.


엄마 아빠보단 IT 기기에 밝고, 영어로 그나마 의사소통이 되고, 해외여행을 좀 더 많이 다녀보았으니 내가 모든 계획을 짜고 이끌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여행 기간만큼은 엄마 아빠를 어깨에 이고 지고 손에 물 한방 물 묻히면 안 된다는 생각.


하지만 이 부담감이 나를 너무 예민하게 만들었다. 엄마가 그냥 궁금해서  묻는 질문도 (보통 "어디로 가면 돼", "우리 머먹을까"였다) 나를 채근하는 듯이 느껴졌고, 예상치 못한 아빠의 돌발 행동은 끊임없이 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아빠는 길이 아닌 곳을 걷고 싶어하거나 모르는 외국인에게 한국어로 말을 거신다.) 

결국 어느 순간 화를 참지 못해 입을 꾹 다고 엄마 아빠를 제치고 저 멀리 앞서 가며 씩씩대는 상황을 연출했다. 불만을 토로하자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고 아빠는 쟤 또 저런다며 같이 화를 냈다. 


초점은 나갔지만. 아빠의 엉뚱함 덕에 베트남 경찰들에게 얻어먹은 과일. 무슨 과일인지는 모르겠다. 

힘든 상황도 상황이지만, 이 돈과 시간을 써가며 즐겁자고 온 여행에서 소중한 시간을 망치고 있는 것 같아 더욱 화가 났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다 별거 아니었는데. 모르는 게 있으면 같이 찾아보고, 애쓰며 재밌게 다니면 되는 거였는데.


이후 오빠와 같이 간 러시아 가족 여행에서는 엄마 아빠도 길을 찾고, 맛집을 알아봤다. 오전 시간은 엄마랑 아빠, 나, 오빠와 새언니 이렇게 세 팀으로 나눠 따로 다니기도 했다. 


엄마 아빠도 지나가다 먹고 싶거나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혼자 가보기도 하며 진짜 자유여행을 즐겼다. 영어를 한마디 하지 못해도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이 러시아 여행은 나의 인생, 최고의 여행이었다. 물론 새언니와 오빠가 많은 부분을 주도적으로 계획했기 때문에 둘의 소감의 알수없다. 하지만 엄마 아빠를 '모시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여행에서의 의무를 분담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이건 나의 효도 자유여행 후회담이다. 그러나 앞으로 부모님과 절대 셋이서 여행가지 않겠어! 하는 후회가 아니다. 다음에 간다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후회이다.  


혹시라도 처음 부모님과 효도 자유여행을 떠난다면 이 글이 좋은 지표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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