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후회하면 어떡하지?
호모 리그렉투스
올해는 기필코 멋진 셔츠를 사야지!
라고 다짐했던 2021년 여름이 지나가고 2022년 여름이 왔다. 여전히 나는 열심히 셔츠를 검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장바구니에 담긴 건 하나도 없다.
나는 옷을 못 산다. 옷뿐만 아니라 신체를 꾸미는 모든 것을 못 산다. 옷, 신발, 액세서리 등등. 안사는게 아니라 못 산다. 내 맘에 쏙 드는 옷을 발견하는 일이 어려울뿐더러 사려고 맘을 먹었다가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계절이 바뀌고 결국 흐지부지 못 사게 된다. 반짝 유행하는 옷들은 고민하는 사이 유행이 지나간다.
그나마 패션 회사로 이직한 덕분에(?) 50% 직원 할인을 받아 옷을 사는 가격적 부담감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옷을 살 때는 어떤 옷을 사야 할지, 이 옷을 이 가격대에 사는 것이 합리적인지 수백 가지 고민을 하게 된다.
옷, 그게 뭐라고
옷을 잘 입는 사람들에 대한 동경이 있다. 좋은 소재의 옷을 입는 사람들. 세련돼 보이는 사람들. 엄청 트렌디하거나 반대로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사람들. 자기와 어울리는 옷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보면서 역시 안목은 타고나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재능 같은 것.
어쩌다 보니 최근에 옷을 잘 입는 분과 가까이 지내게 되었다. 나도 모르게 그분이 입고 오는 옷들을 매일매일 스캔(?) 하다 보니 깨달아버렸다. 옷이 엄청 많구나! 나는 보통 주말에 빨래를 하니 옷을 바꿔 입는 주기가 일주일 정도이다. 그래서 딱 일주일 입을 만큼의 옷만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하의는 며칠 돌려 입어도 모르니 한 계절에 3-4개면 충분했다. 하지만 그분은 달랐다.
그분이 한 번 입은 옷은 일주일이 지나도 이주일이 지나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옷을 잘 입는다는 건 옷을 무지하게 많이 사보고 입어본 후,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다. 역시 저절로 얻어지는 건 없었다.
그렇다면 나도! 많이 사고 많이 입어봐야지! 다짐했건만.
당최 선뜻 옷을 고르지 못하겠다.
먼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못 찾았다. (물론 이것저것 경험해야 하지만, 역시 한 번에 성공하고 싶은 마음..!) 나는 화장을 잘하지 않기 때문에 프릴이 달리거나 쉬폰 소재, 너플거리는 옷은 일단 배제. 하지만 뭔가 캐주얼하게 입기도 나이대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깔끔한 셔츠에 슬랙스 같은 정장 타입을 사야 하나? 근데 요즘 유행하는 옷들도 좀 사고 싶다. 짧은 크롭티에 (머릿속에선 "배탈이 날 것 같아!"라고 외치지만) 넉넉한 사이즈의 바지 같은 Y2K 패션..?
그러니깐 캐주얼을 사려고 하면 정장 타입의 옷을 사고 싶고, 유행하는 옷을 살까 하면 클래식하고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사고 싶다. 서른 중반이 되어서 옷을 사는 것조차 마음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니. 조금 절망스럽기도 하다.
힘겹게 어떤 옷을 사야겠다! 맘을 먹어도 다음 스탭이 쉽지 않다.
작년부터 셔츠에 빠져 넉넉하지만 깔끔한 오버핏 셔츠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셔츠를 고르지 못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이데아 셔츠를 찾지 못했기 때문!
백화점에 둘러보다 특정 셔츠를 보고, "와 사고 싶다!"라고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기 전 인스타그램으로 인플루언서들은 보다가 혹은 길거리에서 어떤 스타일리시한 사람을 지나치다가 "음 왠지 저 사람처럼 셔츠를 입으면 멋질 것 같다. 셔츠를 사볼까?"라고 맘을 먹고, 그때부터 내가 사고 싶은 셔츠의 이상향을 그린다.
여름에 입을 거니 색상이 좀 밝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속옷이 비치지 않아야 해. 그래야 나시나 반팔을 안 껴입어도 되니. 통은 너무 넉넉하지도 너무 슬림하지도 않았으면 좋겠어. 그리고 길이가 너무 길면 바지나 치마에 넣어 입기 애매하고, 너무 짧으면 좀 어정쩡할 것 같아. 재질은 시원해야 돼. 그렇지만 주름이 많이 가지 않는 걸로!
이렇게 내 머릿속에 사고 싶은 셔츠의 이미지를 아주 생생하게 그려놓고, 거기에 맞는 셔츠를 찾는다. 당연하게도 그런 셔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디자인해서 만들기 전까지는.
내 맘에 드는 완벽한 이데아 옷을 발견한다 해도 그런 옷은 보통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내 눈에 완벽한 옷은 남의 눈에도 완벽할 수밖에.
누군가는 비웃을 수 있겠지만, 내가 옷을 사는 가격의 마지노선은 보통 평균 10만 원 대다. 10만 원이 넘어가면 손이 조금 (아주 조금) 바들바들거린다. 참고로 10만 원은 여름 옷과 겨울 옷의 평균값이다. 여름의 기준은 더 낮고, 겨울의 기준은 더 높다. 하하
유독 옷에만 마음이 박하다. 몇 백만 원짜리 노트북이나 닌텐도 같은 IT 기기를 구매하거나, 여행을 결심할 때, 현대무용을 배우거나 영어학원 비용을 결제할 땐 거침이 없다. 충동구매에 가까울 정도로 판단력이 빠르다.
그런데 유독! 옷, 신발, 액세서리 등 나를 꾸미는 데 사용하는 비용에 대해서는 결정도 못하고 가격도 많이 따진다.
30살이 넘으면 그래도 차르르 떨어지는 소재의 꽤나 괜찮은 브랜드 옷을 입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지금 1만 원짜리 티셔츠와 2만 원짜리 청바지를 입고 있다.
얼마 전 아르켓에서 셔츠를 사고 반품을 했다. 색상이나 소재는 맘에 들었지만 지금 입기에 더울 것 같고, 길이가 생각보다 길었다. 다행히 반품비가 무료라서 쿨하게 반품 버튼을 눌렀다.
과연 올 해는 맘에 드는 셔츠를 살 수 있을까? 내일 또다시 네이버 쇼핑을 이리저리 뒤적거리겠지. 지금 이 글을 보고 계신 당신, 혹시 제가 위에 적어 놓은 조건에 부합하는 좋은 셔츠를 알고 계신가요? 아신다면 댓글로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셔츠에 관심이 없다 할지라도 올해 제가 후회 없이 멋진 셔츠를 살 수 있도록 꼭 빌어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