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했던 나의 시간들이 후회되었다.
이건 다짐이다. 2020년 독립투사가 드디어 자유를 얻었다. 부모님 집을 떠나 작은 원룸을 얻었지. 원룸을 얻을 때 만해도 내가 좋아하는 가구, 내가 좋아하는 소품, 내가 좋아하는 옷, 내가 좋아하는 먹거리,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둘러싸인 나를 상상했어. 그러나 그건 33살이나 먹고 첫 독립을 한 나의 망상이었다.
전세 자금부터 만만치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 땐 신경도 쓰지 않았던 세탁바구니와 속옷정리함, 심지어 비누 하나까지 내 돈으로 사야 했다. 화이트 컬러나 내추럴 컬러로 인스타그래머블한 방을 꾸미고 싶었던 나의 로망은 고이 접혔다. 주황색 풀옵션 가구들도 처치곤란이었다.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어차피 이곳은 나의 시작일 뿐, 나는 곧 떠날 것이다. 라는 마음으로 쉽게 단념했다. 그저 친구와 1박 2일 놀러 갈 때 부모님께 알리지 않아도 되고, 밤 몇시에 무엇을 먹던 아-무도 뭐라하지 않는 것, 이거면 됐다 싶었다. 그래서 만족했다. 아니, 만족했었다.
임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못생긴 가구들로 채워진 원룸엔 당최 정이 가지 않았다. 마치 남의 집에 얹혀 사는 것처럼 (사실 정확하게는 남의 집에 얹혀사는 게 맞지) 책은 대충 침대 옆에 쌓아놓고, 친구가 준 값비싼 향초는 나중을 위해 서랍에 넣어두었다. 좋은 물건은 이 집에 사치였다. 집을 싫어하는 이유들이 악순환되며 쌓여갔다.
퇴사를 하고 유튜브에 빠져 살았다. 디에디트 라이브 채널을 돌려보던 중 나랑 나잇대가 비슷한 에디터M님의 독립일지가 눈에 띄었다. 시리즈 이름은 '혼자 살아보겠습니다'. 나와 같은 전세를 살고 있지만 에디터M은 나의 로망을 차근차근 실현했다. 에디터M은 샷시부터 벽지, 스위치와 문 손잡이까지 자신의 취향대로 바꿔나갔다. 새하얀 벽지와 새하얀 가구, 그곳에 오리지널리티가 넘치는 의자를 놓고 조명을 달았다. 내가 유예시켜 놓았던 사치스런 제품들이 에디터M의 집에선 멋들어지게 사용되고 있었다. 영상으로 몰래 본 에디터M의 삶은 유예되지 않았다.
언제인지도 모를 더 나은 환경을 위해 유예했던 나의 시간들이 후회되었다.
나는 바뀌고 싶었다. 하지만 대뜸 원룸의 가구를 몽땅 바꿔버리기엔 용기가 없었다. 대신 촌스런 주황색 가구들과 어우러질 나의 삶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차근차근 지금 필요한 물건, 내가 좋아하는 물건들을 채워나가자고 마음먹었다. 조그만 공간에 청소기가 필요할까 싶어 미뤄놨던 청소기부터 샀다. LG청소기는 정말 오버 같아 샤오미의 무선청소기를 골랐다. 성능이 좋은 일렉트로닉스를 살까 하다 휘황찬란한 색을 또 더하고 싶지 않아 조금 불편해도 최대한 심플한 화이트 색상으로 선택했다. 이사 오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은 모두 정리했고, 시기가 지난 겨울 옷은 압축팩에 넣어 침대 밑에 숨겨놓았다. 이사 오고 한동안 열심히 쓰다 귀찮아져버린 커피 머신과 어거지로 읽었던 책들은 당근마켓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좋은 집에 가면 써야지 생각했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놓았다.
작년 생일을 맞아 차장님께서 사주신 딥디크 향초이다. 가성비를 따지며 머리를 굴리다 내 돈으로는 선뜻 사지 못할 것 같은 걸 턱 하니 선물로 사주시는 통 큰 분이다. 얼마 전 퇴사했을 때는 샤넬 립밤을 주셨다. 립스틱도 아닌 립밤을! 선물 받은 지 6개월이 지나서야 드디어 첫 불을 붙였다.
상품 상세 정보에는 로즈와 블랙 커런트 베이스의 러블리한 향이라고 기재되어 있지만 코 끝을 찡하게 하는 스파이시한 향도 함께 감돈다.
장시간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이국적인 여행지. 값비싼 호텔에 도착해 노곤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침대에 가보니 검붉은 말린 장미가 흩뿌려져 있다. 씻지도 않은 몸을 침대 위에 던졌을 때, 달달한 장미와 포근한 침구 향 그리고 절여진 나의 땀냄새를 머금은 피로하지만 설레는 여행의 순간이 생각난다. 막연히 낭만적이기보단 현실의 고단함을 한 꼬집 담아내 더욱 매력적이다.
퇴사 선물로 받은 복(福) 캔들. 어느곳에서나 복이 가득하길 바라는 대리님의 선물. 어쩌다 보니 모두 회사 사람들에게 받은 캔들을 2개나 소개한다.
오이뮤는 민음사 북클럽의 굿즈를 제작하는 디자인 업체이다. 감각적이고 섬세한 소재, 컬러를 사용해 오이뮤의 물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어느 봄날 반짝이는 청초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복캔들을 곁에 두고 늘 복된 하루가 쌓이기를 바랍니다"
캔들 상자 안에 성냥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캔들을 켜지 않아도 선물해 주신 분의 따뜻한 응원 덕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나도 밝아질 거라는 용기가 생긴다.
기계식 키보드는 꿈이었다. 집에서는 노트북을 썼고, 회사에서 쓰기엔 소리가 너무 커 눈치가 보였다. 선물로 받은 데스크톱을 설치하다가 깨달았다. 나에겐 키보드가 없다. 지금이다. 나에게 기계식 키보드를 쓸 기회가 왔다. 쿠팡을 켜고 로켓 배송이 가능한 기계식 키보드를 찾았다. 입문용으로 10만원 안 쪽의 제품들을 살펴보다 클래식한 디자인의 COX 가 눈에 들어왔다. COX 브랜드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다 싶더니 역시, 디에디트의 에디터B가 추천한 키보드 브랜드였다. 물론 이 키보드를 추천하지 않았지만 브랜드가 같다면 믿어도 되지 않을까? 내 눈에 이쁘고 가격도 저렴하면 입문용으로 딱이지 않나?
역시 우리나라의 배송 시스템. 어제 구매한 키보드가 아침 7시에 도착했다. 텐키리스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했던건 기우였다. 회사도 아니고 집에서 텐키를 쓸 일은 적었다. 공간도 적게 차지하고, 마우스를 가까이 놀 수 있어 동선도 편했다.
타닥타닥 처음 써보는 기계식 키보드, 타이핑이 만들어 내는 이 리드미컬한 경쾌함. 아 이 맛이구나! 누렇게 변해버린 나의 책상이 클래식한 화이트 칼라의 키보드와 대조돼 조금 초라해 보이지만, 그래도 글을 좀 더 오래 앉아 쓸 수 있을 것만 같아!
남양주 엄마 집에서 데려온 민트 모종. 엄마가 손수 만든 레몬청을 주면서 말했다. 찬 물에 섞어 먹을 때 한 잎씩 띄워 먹으라고. 동네 길가에 있는 민트를 뿌리째 뽑아 페트병에 고이 넣고, 비닐봉지로 딴딴히 묶어 서울까지 가져다주었다. 너의 이름은 민트가 아닌 사랑.
그런데 왜 이럴까? 길바닥에선 잘 자라더니 우리집에 오고나서 비실비실하다. 햇빛을 못 봐서 웃자라는 건지 줄기만 길어지고 풍성해지진 않는다. 그래도 코를 댔을 때 퍼져나가는 민트 향이 제법이다. 한 잎을 떼먹기엔 아직 연약한 나의 민트. 시원한 레몬차에 톡 하고 떨어뜨릴 날을 기다리며. 추앙하며 키워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