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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화 Jun 11. 2020

미지근한 맥주

초단편소설

 우중충한 비나 쏟아졌으면 하는 내 기대와는 달리 아침부터 창을 뚫고 들어오는 따가운 햇살 때문에 일찍 잠에서 깨고 말았다. 지난달부터 필라테스 강습은 매주 금요일 마지막 시간으로 잡았다. 캐딜락*위에서 2시간 동안 몸을 혹사시키고도 모자라서 학원에서 나오자마자 동네 고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새벽 1~2시까지 트랙을 뛴다. 그렇게 금요일 밤은 항상 최대한 몸을 혹사시킨 후에 녹초가 된 상태로 집에 들어간다. 누구는 주말이면 12시간씩 자기도 한다는데 쓸데없이 건강하고 규칙적인 건지 아무리 거칠게 굴려도 아침 6시 30분이면 자동으로 깨어난다. 지긋지긋한 주말의 시작이다. * 필라테스 기구 얼마 전 4년간의 연애가 확신 없는 이별로 정리됐다. 둘 중 누구도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의 연애에서 뜨거웠던 애정이 식은 지는 꽤나 오래되었었다. 서로 나눌 것이 없는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겨우 지탱해준 각자의 의지마저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지다 어느 순간 우리가 이별을 한 거구나 하고 느꼈던 것 같다. 처음엔 바쁘게 지내보려 했다. 왕래가 뜸했던 친구들에게 연락해 약속도 잡고, 중국어 초급반 수업도 등록했다. 소개팅도 일주일에 하나씩은 꼬박꼬박 잡았다. 누가 그랬던 것 같은데, 이별에는 애도의 기간이라는 게 필요하다고. 브런치를 먹으며 최근 근황을 물어보는 친구 앞에서 X가 좋아하던 에그 베네딕트를 시킨 옆 테이블 남자를 보고 X를 떠올리고, 한창 중국어의 성조를 배우는 강의실에서 아직 제대로 읽을 줄도 모르면서 X의 중국식 이름을 만들어 써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별 직후 들어오는 소개팅은 어중간한 게 대부분인데, 이게 상대의 탓인지 X의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마음이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어중간한 소개팅은 괜히 X생각을 더 나게 해서 잠들기 힘들어질 거라는 얘기는 왜 아무도 해주지 않은 걸까. 결국 소개팅이고 뭐고 주말은 집에서 나가지 않기로 하고부터 주말은 고요의 시간이 되었다. 비장한 마음으로 48시간의 고요를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주말 행동강령을 세웠다. 1. 밖은 해가 쨍쨍하지만 암막 커튼을 치고 집을 최대한 어둡게 한다. : 밖을 나설 엄두도 나지 않지만 밖의 햇살과 따뜻함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2. 텔레비전은 절대 켜지 않는다. 물론 컴퓨터도 포함이다. : 광고 cm송만 들어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휘감는다. 3. 소설을 꺼내 든다. (로맨스는 제외, 추리/SF/스릴러 등등 사랑 얘기가 없는 것으로 고른다.) : 비현실적인 스토리의 소설 속에는 X를 연상시키는 것들이 잘 등장하지 않는다. 4. 맥주는 베란다에 미지근한 상태로 보관한다. : 얼음장같이 차가운 맥주는 짜릿함을 선사하겠지만 머릿속도 복잡하게 헤집어 놓을지도 모른다. 간밤의 필라테스-러닝 혹사가 효과가 있었는지 꽤나 느지막이 잠에서 깬듯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오전 10시가 넘어있었다. 어디선가 본 아침을 꼭 챙겨 먹어야 우울증 극복에 도움이 된다는 얘기가 떠올라 어두컴컴한 거실로 손을 더듬더듬하며 나아간다. 최소한의 조면만 키고 요거트에 그래놀라를 타서 슥슥 비벼서 먹기 시작한다. 먹는 동안 핸드폰을 보거나 티브이를 보지 않기 때문에 그래놀라를 와그작와그작 씹는 소리에 온전히 집중한다. 대충 아침식사를 마치고 나서 아침운동으로 요가를 시작한다. 가사가 없는 요가 음악을 듣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다는 게 참 마음에 든다. 요가를 마치고 나서 땀도 송송 나고 뜨끈뜨끈해진 체온에 기분이 업 된 건지 잠시 거실 커튼을 열어 밖을 볼까 하다가 꾹 참기로 하고 얼른 찬물로 샤워를 해서 몸을 차갑게 가라앉힌다. 2주 전에 인터넷 서점을 통해 주문한 소설책 10권 중에 벌써 9권을 읽어버려 곧 새로 주문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 한 권 남은 소설책을 들고 소파에 몸을 던진다. 배가 조금 고프다는 생각을 하지만 우선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그마한 거실조명을 켜고 책을 읽기 시작한다. 30분쯤 읽다 보니 러브스토리는 아닌데 불륜 얘기가 나온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책을 덮고 베란다로 가서 맥주를 꺼내온다. 미지근한 카스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금 소파에 몸을 착 감으며 책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3시간을 그렇게 소리 없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맥주는 처음 한 모금 이후 소파 옆 트레이에 한참이나 방치되어 김은 좀 빠졌지만 처음의 온도와 별반 차이는 없다. 소설 속 결말에서 여자 주인공은 남편이 게이였다는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책을 잘못 골랐다는 생각을 하며 밍밍한 카스를 다시 집어 든다. 책을 덮고 미지근한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시면서 나는 소파 속으로 잠수함처럼 깊이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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