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단편소설
- 3월 15일, 화요일 ‘결혼식 같은 건 그냥 직계 가족들만 모여서 하면 안 되나?’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온 B는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아래층 부서 모 대리의 청첩장을 들어 보이며 투덜댄다. B는 청첩장 봉투 중앙에 가지런히 자리 잡은 은빛 스티커는 무시한 채 거칠게 봉투를 뜯어낸다. 그리고 내용물 제일 아래에 적혀있는 결혼식 장소를 흘기듯 보고 나서 짜증을 내뱉듯 얘기한다. ‘인사라도 제대로 하고 청첩장 주고 가는 게 예의 아니야? 수원에서 오후 4시 결혼식이면 주말 하루를 통째로 남의 집 잔치에 끌려가는 거잖아 이건.’ A는 B가 짜증스럽게 얘기하는 것이 단지 청첩장을 인사 없이 두고 간 것 때문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늘 점심식사를 할 때면 회사에 변변찮은 남자가 없다며 투덜거리는 B에게 유일하게 괜찮은 남자로 평가받은, 게다가 여태껏 싱글인 줄 알았던 아래층 모 대리가 돌연 결혼 소식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직접 인사도 없이 청첩장을 두고 간 것도, 흔해 빠진 공장식 예식을 보기 위해 수원까지 가야 하는 것도 기분 상한다는 B의 나지막한 투정은 어쩐지 아쉬움이 섞인 채 간당간당하게 칸막이를 넘어가지 않는다.
그런 B의 투덜거림을 적당히 받아주는 A는 사실 아래층 모 대리가 인사 없이 청첩장을 두고 간 것이 그녀 자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회사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지만 작년 초까지 가열차게 A에게 애정공세를 퍼부어왔던 모 대리가 그녀의 얼굴을 직접 보고 청첩장을 건네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변하지 않을 것 같았던 모 대리의 애정공세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렇듯 별 반응 없는 A에게 지친 것인지 금세 새로운 사랑을 찾아내었다. 이쯤 되면 A의 마음도 편치 않겠구나 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사실 엊그제 산 원피스를 이번 주말에 바로 개시할 수 있게 됐다는 것에 기쁘다. 한때 완벽한 로맨스를 꿈꿨던 A는 어느새 남자보다는 필라테스, 고양이, 쇼핑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이 당연한 사람이 되었다. 친구들이 학창 시절 한두 번쯤 풋풋한 사춘기의 연애를 경험해볼 때 A의 관심사는 오직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뿐이었다. 사실 그렇다고 해서 A가 이성에 관심이 없었다고는 할 수는 없는 게 애초에 그녀에게 좋은 대학이라는 것이 완벽한 로맨스를 찾기 위한 무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A는 대학교에 입학 후 마주하게 될, 완벽한 로맨스를 위해 욕구를 철저하게 절제해 왔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겠다. 그렇게 학창 시절 내내 인내심으로 꾹꾹 억눌러오던 애정이란 감정을 처음으로 폭발시켰던 대학교 1학년 그녀의 첫 연애는 고작 3개월 만에 끝이 났다.
사실 처음 두 달 간은 그녀가 꿈꿔오던 완벽한 로맨스였다. 교정을 거닐 던 A에게 과잠을 입은 운동부 이미지의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고 한동안의 적절하고 꽁냥꽁냥한 탐색전 끝에 처음으로 연애라는 걸 시작했었다. 하지만 연애초 A를 위해 무엇이든 다 바칠 것만 같았던 그녀의 첫 남자 친구는 스킨십 진도를 차근차근 빠른 속도로 빼나가기 시작하더니 최종 단계를 달성하자마자 뜨뜻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아메리카노처럼 싱거운 사람이 되었다. 이후에 그녀를 거쳐간 대부분의 남자 친구들 또한 각자의 이유가 달랐겠지만 그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연애 초 그녀에게 달콤한 말로 사랑을 속삭이던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다수의 경험을 통해 A는 어느 순간 완벽한 로맨스에 대한 환상을 버려버렸다. - 3월 20일, 일요일 티브이 속 기상캐스터는 꽃샘추위가 만만치 않을 테니 따뜻하게 입고 외출하라는 경고를 한다. 경기 이남 지역에서는 한때 눈 소식도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A는 집을 나서기 전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가다듬어본다. 봄 원피스를 입기엔 오늘 너무 춥지 않을까 하고 잠시 생각하다가 '모처럼 거금을 주고 지른 원피스인데.. 3월 말이면 충분한 봄이잖아' 하며 마음을 다잡고 한번 더 거울 속 모습을 살핀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 얼음장 같은 칼바람이 A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빨리 택시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A는 작년 한 해 25만 쌍이 결혼하고 10만 쌍이 이혼을 했다는 기사가 문득 떠오른다. 40퍼센트의 확률로 남남이 될지 모르는 두 사람을 잠시나마 축하하기 위해 오들오들 떨면서 택시를 잡아탔다. 타자마자 택시 기사 아저씨가 가는 춥지 않냐는 질문을 시작으로 다음 달에 있을 총선 얘기까지 이어지자 A는 자연스럽게 이어폰을 끼우는 시늉을 했다. 사실 노래는 틀지 않아 기사 아저씨의 계속되는 질문은 여전히 잘 들리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 태연하게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한남대교를 건널 때쯤 A가 이어폰을 낀 사실을 인지한 기사 아저씨는 그제야 질문을 멈췄고 택시 안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그녀는 음악을 플레이한다. 결혼식장에 도착해 멀리서 손을 흔드는 B를 발견하고 A는 반가운 표정으로 눈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눈인사 정도 하는 모 대리와의 어중간한 사이를 대변하는 금액을 축의금으로 내고 식권을 받았다. 변변찮은 축가 2곡이 끝날 즈음 B가 팔짱을 끼며 밥이나 먹으러 가자고 A를 끌어당기지만 A는 이왕 참석한 티를 내려면 사진이라도 찍어야 하지 않겠냐고 B를 설득한다. B는 사진 찍기에는 애매한 사이 아니냐고 반문하려다가 꽤 신경 쓰고 온듯한 A의 말에 딱히 토를 달지 않기로 생각한다.
그렇게 A와 B는 모 대리와 신부의 고등학교/대학교 절친들 사이에 껴서 기념사진 촬영까지 마치고 나서야 피로연장으로 이동한다. A는 기름기 가득한 메뉴들을 최대한 피해서 가지런히 담은 뷔페 접시를 들고 B와 함께 그냥저냥 아는 회사 사람들 틈에 끼어서 식사를 시작했다. 회사 직원들 모두 사진 촬영은 생략한 듯 대부분 식사를 마쳐가는 분위기다. 배도 고프고 사진 촬영하느라 덥기도 했던 B는 자리에 앉아 경량 패딩을 벗으며 오늘 눈 소식도 있다는데 원피스가 웬 말이냐며 A를 타박한다. 한복으로 바꿔 입은 신랑 신부가 피로연장에 인사를 돌고 나서야 진즉 식사를 마친 하객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A는 뷔페 접시를 두 번 비우고 디저트도 한 접시 비운 후에 천천히 일어나기로 한다. B는 예정에 없던 남자 친구의 연락을 받고 혼자 두고 가서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A가 한 접시도 채 비우기 전에 이미 자리를 떴다. 밖을 나서니 이미 어둑어둑해진 하늘에 주말이 끝나가고 있음을 느끼고 A는 좀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A는 원래보다 두 정거장 앞에서 버스에서 내려 걷기 시작한다. 내리자마자 콧물이 주욱 나와서 다시 버스를 탈까 싶었지만 발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찬바람이 싫지 않아 A는 계속 걷기로 한다. 또각또각 소리에 집중하며 가지런한 보도블록 패턴의 금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걸어본다. 집 근처에 거의 다다를 때쯤 콧물이 다시 한번 주욱 흐른다. 보도블록 금을 밟아버려 이번 주는 재수가 없겠다 생각하고 고개를 드니 A의 뺨에 차가운 게 떨어진다. 서울에도 눈 소식이 전해졌구나 생각하는 찰나 시끄러운 소리에 돌아보니 오다가다 보던 포장마차에서 싸움이라도 난 듯하다. 소주 반 병에 우동 한 그릇 먹고 나오면 소복하게 눈이 쌓여있겠지 하며 A는 포장마차로 들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