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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의사의 과대망상과 절망

by 닥터추박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우매함의 봉우리에 있거나, 절망의 계곡에 빠져 있는 것들이 있나요?


여러분의 상황에 대입해서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 보세요.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특히 자신이 지금 '우매함의 봉우리'에 서 있는지,

아니면 '절망의 계곡'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지

스스로 깨닫는 일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런 시기를 경험한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시기를 분명히 기억하게 해 준 사례가 있다.

바로 수술 경험이다.


정형외과 전문의를 취득하고

대체 복무('병판의')를 마친 후,

나는 대학병원으로 복귀해

세부 전공인 견관절 분야 펠로우 과정을 밟았다.


처음으로 수술을 단독 집도하게 되었을 때,

감정은 지금도 생생하다.
긴장, 두려움, 흥분, 책임감, 기대...

온갖 감정이 뒤섞인 채 수술실에 들어섰다.


준비는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수술은 늘 교과서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그래도 큰 문제없이 마무리되었고,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수술을 무사히 집도하며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펠로우 과정을 마치고 로컬 병원에 취직한 후부터는

본격적인 수술의 연속이었다.

한 달 평균 30건.

1-2년 만에 400~500건의 수술을 집도하게 됐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 꽤 잘하고 있는 거 아냐?’
‘동료들보다 수술 속도도 빠르고, 결과도 나쁘지 않은데?’

이게 바로 ‘우매함의 봉우리’였다.


수술 전 체크리스트도 느슨해졌고,

케이스 스터디에서조차

타인의 피드백보다 내 방식에 대한 확신이 앞섰다.

그땐 몰랐다.

진짜 무서운 건 실수가 아니라

‘자신을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착각의 대가는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찾아왔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는데,

일부 환자가 통증을 계속 호소했다.
영상에서는 이상이 없는데,

환자는 만족하지 못했다.

'합병증'이라는 단어가 차트에 등장할 때마다

나의 자신감은 조금씩 무너졌다.

처음엔 환자의 문제로 돌리기도 했다.

통증에 예민한 체질,

회복력의 개인차,

혹은 단순한 우연.

하지만 케이스가 쌓일수록

더 이상 외부 탓만 할 수 없었다.

"혹시 나의 수술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이 의문은 곧 불안으로 바뀌었고,

불안은 자신감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게 바로 ‘절망의 계곡’이었다.

남들은 내가 이제 수술에 익숙해졌다고 말했지만,

나는 매 수술마다 내 능력을 의심했다.

그 불안은 홀로 앉아 차트를 들여다볼 때,

환자가 진료실에서

"선생님, 저는 왜 아직도 아픈 걸까요?"라고 물을 때

가장 깊이 파고들었다.


그 시기부터 나는 내 실력과 태도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우매함의 봉우리’에서 내려와

‘절망의 계곡’을 걷는 길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길을 통해 나는 ‘성장의 언덕’으로 가는 문을 찾을 수 있었다.


고민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수술을 이어갔다.

더욱 철저히 준비하고,

환자의 상황을 세심히 고려했다.


시간이 지나 1000건 이상 수술을 집도했고,

경험이 쌓이면서 자신감도 서서히 회복되었다.


보통 5-6년이 지나면,

약 1500-2000건의 수술 경험을 쌓아야

비로소 자신감과 실력이 균형을 이루는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도달한다고 한다.

나 역시 그 고원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나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나는 다음의 다섯 가지 방법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1. 피드백에 귀 기울이기


"괜찮았어."라는 말보다
"왜 그렇게 했어?"라는 말이 더 고마운 순간이 왔다.

동료나 선배들에게 솔직하게 피드백을 요청하고,

이를 겸허히 받아들였다.


타인의 시선은 나를 객관적으로 비춰주는 거울이다.


2. 데이터와 통계로 내 수술을 분석하기


감(感)은 과신을 만들고,

수치(數値)는 진실을 말한다.
수술 시간, 합병증 발생률, 재수술 비율 등.
‘느낌’이 아닌 ‘팩트’로 나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3. 배움을 멈추지 않기


벗어나

학회나 세미나에 참석하며 동료 의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학습과 경험은 쌓을수록 더 넓은 시야를 가질 수 있었다.


4. 글쓰기와 기록


수술 뒤 느낀 감정, 케이스 리뷰, 실패 원인 정리.
글로 쓰는 순간,

나는 '행위자'가 아니라 '관찰자'가 된다.
글쓰기는 가장 객관적인 성찰의 도구였다.


5. 정기적인 자기 점검 시간


매달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하루 10분.
커피 한 잔과 함께 ‘이번 주의 수술’에 대해 돌아보는 습관.
‘잘했는가?’보다 ‘어디를 고치면 더 좋았을까?’를 묻는 시간.


일상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의사라는 직업은,

누군가에게 생명을 걸고 신뢰를 주는 자리다.
그래서 더 조심스러워야 하고,

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처음 수술을 시작했을 땐

‘성공적인 결과’만이 내 기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진짜 성공’은 환자의 일상에, 삶에, 그리고 고통에서의 해방에 있다.


자신감은 경험이 쌓이며 다시 자라난다.
그러나 이제는 겸손이라는 뿌리 위에,
객관이라는 줄기,
책임이라는 열매를 맺고 있다.


‘우매함의 봉우리’에서 내려오고,
‘절망의 계곡’을 지나,
‘균형의 고원’에 오르기까지.

그 여정은 외롭고 고되지만,
결코 헛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매일 나를 돌아보는 법,
더 나은 의사가 되기 위한 질문을 던지는 법,
그리고 실패를 받아들이는 용기를 배웠다.


진정한 전문가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실패를 정직하게 마주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야말로 진짜 전문가다.


오늘도 환자의 곁에서,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거울 앞에서
나는 한 걸음 더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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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사용된 심리학 개념들


더닝 크루더 효과(Dunning - Kruger Effect)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할수록 과대평가하고, 반대로 능력이 높지만,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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