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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Sep 23. 2024

그냥 하는 거지

♬BGM

나연-ABCD


Hey listen to me now

ABCD 반복해

How to fall in love

가르쳐 줄게          



1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렀다. 보통 한 번에 15~20초 정도의 안무를 배우는데, 1시간을 쉬지 않고 따라 해도 잘 외워지지 않았다. 선생님이 함께 해줄 때는 겨우겨우 따라 하다가도 우리끼리만 해보라고 하면 금세 뇌가 리셋 됐다. 예습과 복습을 하지 않고 학원 수업에만 의존하면 잘 추기는커녕 안무 외우기조차 안 됐다. 게다가 학원에서 촬영해 준 흐릿한 영상만 돌려보면서 혼자 연습하긴 힘들었다. 선생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까 물었더니 “채릉 영상으로 연습하세요. 선생님들도 대부분 그 사람 영상 보면서 안무 따요.”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의 세 번째 선생님은 유튜버 ‘알로하 채릉’님이 됐다. 리아킴 스승님 이후로 비대면 선생님은 안 만들려고 했는데 채릉님을 영접하곤 스승으로 모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무 배우기 영상을 전문으로 업로드하는 유튜버는 꽤 많았다. 여러 영상을 봤지만 한 채널에 정착하지는 않았는데 ‘알로하 채릉’은 좀 달랐다. 앞모습과 뒷모습 모두 잘 보이는 영상 각도, 움직임에만 집중할 수 있게 깔끔한 화이트톤 연습실, 동작이 잘 보이면서도 힙한 의상 선택까지 마음에 안 드는 걸 찾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경상도 사투리가 살짝살짝 느껴지는 친절하고 귀여운 말투까지! 속도와 억양, 톤까지 내 맘에 쏙 드는 선생님이었다. 1절을 몽땅 올려주시는 것도 좋았다. 빨리 업로드해서 조회수를 선점하려면 포인트 안무만 올리는 게 이득일 텐데, 채릉님은 항상 1절 전체를 올려주셨다. 한 곡 당 커버 영상, 튜토리얼 영상, 속도별 영상 세 개가 올라오는데, 혼자 연습하기에 정말 좋았다. 먼저 커버 영상을 보면서 눈으로 익힌 다음, 튜토리얼 영상을 보면서 동작을 익히고, 속도별 반복 영상을 여러 번 돌려 보면서 안무를 외웠다. ‘알로하 채릉’은 유튜브를 거의 보지 않는 내가 처음으로 ‘구독’을 누른 채널이 되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났다고 해서 실력이 당장 오르는 건 아니다. 안무 외우는 것은 여전히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일이었다. 처음에 안무를 외울 때는 일단 가사부터 암기했다. 이 안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이해하면 좀 쉽게 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케이팝 안무에서, 특히 포인트 안무는 가사에 맞춘 동작이 많다. 아이브의 ‘해야’를 예로 들자면, “해야 해야 해야 한 입에 널 삼킬 때야”라는 가사에서 양손으로 동그랗게 해를 만들어 아랫배에서 머리까지 손을 돌리면서 올려준 다음 그 해를 삼키는 동작을 한다. 이렇게 가사와 동작을 연결해 이해를 한 뒤 비로소 몸을 움직여 안무를 외우려다 보니 이해가 되지 않는 안무는 도저히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고 한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넘어갈 때 버퍼링이 생겼다.

일종의 직업병 같았다. 하루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왜?”라고 묻는 것이다. 13년을 글쓰기 강사로 살고 있다.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글쓰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왜?”라고 물으며 살지 않았다는 것이다. 논리적인 글을 쓰던 감상적인 글을 쓰던 일단 쓰려면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 그러면 한 페이지도 채우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고양이가 좋아요.”라고 하는 학생에게 “왜 좋아요? 어떤 점에서 매력적인가요?”하고 묻고, “자신이 싫다.”고 말하는 학생에게 “왜 싫은가요? 언제부터 그랬나요?”하고 자세히 묻고 또 물어 글을 이어나가게 돕는 일을 하다 보니 어떤 일에든 “왜 하지?”, “뭐 때문에 이렇게 됐지?”하고 사고하는 게 버릇이 됐다.

춤을 출 때 이 버릇이 딱히 좋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니, 나빴다. 해를 동그랗게 표현하든 세모나게 표현하든 그냥 따라 하라고! 이 안무의 기원에 대해 궁금해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그런 쓸데없는 고민하면서 누워서 발꼬락만 까딱거리지 말고 일어서서 아무 생각 말고 지칠 때까지 반복하란 말이야! 이게 정답이었다. 연아 신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무슨 생각을 해. 그냥 하는 거지.”가 진리인 것이다.


기억은 두 가지로 나뉜다. 선언적 기억과 비선언적 기억이다. 선언적 기억은 특정한 경험과 지식에 대한 언어적•논리적 기억이고, 비선언적 기억은 의미나 인과 관계와 상관없이 언어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두 기억이 각각 뇌의 다른 부분에서 다루어진다고 보는 뇌과학자도 있다.

오랜 세월 오로지 선언적 기억에만 뇌를 활용한 것 같다. 일상에 필요한 최소한의 습관을 제외하고는 ‘몸으로 기억’하는 활동을 한 경험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안무를 외우는 것이 이토록 힘든 걸까 하고 중얼거리는 내게 남편은 “연습을 덜 해서 그렇지.”하고 아주 간편한 대꾸를 한다.

지독히도 맞는 말이긴 하다. 몸으로 기억하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2017년 「회색인간」을 시작으로 1000편이 넘는 소설을 쓴 김동식 작가는 소설가가 되기 전에 10년간 주물공장에서 하루 9시간 이상 일했다고 한다. 사방이 막힌 작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반복하는 지루한 시간 내내 머릿속으로는 기기괴괴한 이야기를 떠올렸고 밤마다 낮에 상상했던 이야기를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다. 그렇게 쓴 이야기가 1년 반 동안 300여 편이 넘었다니 이틀간 한 편을 쓴 셈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떻게 딴생각을 하면서 다치지 않고 실수 없이 일할 수 있었을지가 궁금했다. 손발이 자동으로 움직였던 것은 몸으로 기억할 만큼 수없이 반복했던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언적 기억과 비선언적 기억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도록 뇌가 설계되어 있는데 나는 그걸 쓰질 않고 살았나 보다. 뇌가 한심하게 바라보며 쯔쯧 혀를 차고 있을 것 같다.


나의 성향을 탓하며 가만있을 핑계를 대지 말고 ‘안 되면 될 때까지!’ 정신으로 움직이다 보면 언젠가는 ‘세븐틴 반응 속도’ 영상처럼 음악만 나오면 자동으로 안무가 재생되는 순간이 올까? 한 곡을 겨우 다 외웠다 싶으면 그전에 했던 안무는 1초도 생각이 안 나는 걸로 보아 긍정 회로가 선뜻 돌아가지 않는다. 음악에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뇌를 훈련시키기 위해 연습 시간을 늘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은 없다. 지난번 안무는 5시간 연습했으니 이번엔 7시간을 해보자. 그래도 안 되면 10시간을 해보자. 근데 도저히 그 이상은 시간을 못 낼 것 같으니(이것도 핑계일까) 그래도 안 되면 못 외운 부분을 막춤으로 채울 수 있는 깡을 대안으로 마련해 보아야겠다.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스트레칭 하는 김연아 선수에게 무슨 생각하면서 스트레칭 하는지 물었을 때 김연아가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한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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