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영탁-찐이야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진짜가 나타났다 지금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찐하게 사랑할 거야
마흔이 되어 갑자기 건강염려증이 생긴 나는 얼른 병원으로 가 종합건강검진을 받았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었지만, 이대로 살다가는 앉아만 있어도 숨이 차겠다 싶어 거금 160만 원을 들여 3개월간 PT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근육이 2kg 늘었으니 1kg당 80만 원을 들여 근육을 산 셈이 됐다. 어쨌든 조그만 근육 덩어리가 발휘하는 긍정 마인드는 힘이 매우 셌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에 댄스학원까지 진출했으니. 그러나 댄스도 운동이지 하면서 헬스를 그만두었더니, 비축해 둔 내 피 같은 근육 저금이 금세 빠지기 시작했다.
댄스는 운동이 아니었다. 댄스는 몸을 튼튼하게 만드는 활동이 아니라 몸을 혹사하는 활동이었다. 오랜 기간 춤을 춘 아이돌이나 댄서가 몸이 다 망가졌다고 하는 말이 빈 말이 아니었다. 댄스 학원 선생님은 무릎을 굽히는 동작을 잘 못했는데 20대임에도 불구하고 무릎이 온전치 않은 이유가 어린 시절부터 춤을 췄기 때문이라고 했다. 춤을 추면서 정신은 건강해질 수 있으나 몸은 그렇지 않았다. 춤을 계속 추기 위해서라도 몸을 단련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헬스는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20대부터 내가 해본 운동이라고는 헬스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이라 좋았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해야 하는 운동이 성미에 맞지 않았고, 복잡하고 어려운 규칙이나 루틴을 익혀야 하는 운동도 싫었다. 옷이나 도구를 갖춰야 할 수 있거나 특정한 장소를 찾아가야 하는 것도 게으른 나에겐 맞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시간에 아무거나 걸쳐 입고 가장 가까운 동네 헬스장에 가는 것이 내겐 제일 적합한 운동이었다. 20대 땐 목적이 다이어트밖에 없었기에, 살이 찌면 헬스장을 찾는 게 나의 유일한 운동이었다.
20년간 혼자도 해보고, 개인 트레이닝도 받아보고, 그룹 트레이닝도 받아보니 이제 쇠냄새라면 징글징글했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다른 운동을 접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에 주변에 운동을 배울 수 있는 공간을 검색해 보았다. 생각보다 다양한 운동거리가 반경 2km 안에 널려 있었다. 테니스, 배드민턴, 탁구, 축구 등의 구기 종목이 있었고, 합기도, 주짓수, 킥복싱 등의 무예 종목도 있었다. 또, 필라테스, 줌바는 기본에 점핑, 스피닝, 번지 피지오, 플라잉 요가 등 어디서 이름 정도는 들어본 운동부터 아예 처음 보는 운동까지 없는 게 없었다.
선택지는 다양했으나 선택이 쉽지는 않았는데 무엇 하나 진입 장벽이 낮아 보이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의 크기와 실행력이 늘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구기 종목은 기초체력 없이 덤비다간 부상만 입을 것 같았고, 무예 종목은 누군가와 마주 보고 기싸움을 해야 할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점핑이나 스피닝은 살짝 구경해 본 바로, MBTI가 ‘EEEE’ 정도는 돼야 입구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보고 싶은 것은 많았으나 결국 나는 예전에 한두 달 맛을 봤던 요가를 선택했다.
만만해 보여 선택했던 요가를 겨우 한 달 하고는 그만두었다.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몇 달간 댄스학원을 다니면서 120 BPM 이상의 음악에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분명 힘은 드는데 심심했다. 5분 단위로 시계를 확인하다가 깜빡 잠이 들기도 하는 등 정적인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었다. 헬스장에 늘 댄스음악만 흘러나오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요가를 그만두고 잠시 방황하던 중 인스타그램의 알고리즘이 나를 한 복싱학원의 피드로 안내해 주었다. 흡사 나이트클럽 같은 조명 아래서 글러브를 낀 사람들이 댄스음악에 맞춰 주먹을 휘두르고 있는 영상. 한때 복싱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당시 인사 한 번 나눠보지 않았던 이웃 남자가 한밤중에 “안 자고 뭐해요?ㅎㅎ” 등의 메시지를 보내는 통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덕분에(?) 밤늦게까지 책방에서 책을 읽는 습관을 싹 고치고 일찍 퇴근하기도 했으나(1층이 책방, 2층이 집), 어쨌든 혹시 모를 상황에 내 몸을 지킬 수 있는 호신술 정도는 알고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합기도나 복싱을 배워볼까 생각했던 것이다.
가까이 복싱장이 있었는데, 문의는 해놓고 가보지는 않았다. 복싱 배우러 가면 줄넘기만 주구장창 시킨다는 말에 겁을 먹은 것도 있고(줄넘기 한 개밖에 못함), 밝은 조명 아래서 누군가와 눈을 맞추고 펀치를 날린다는 게 내향인으로서 망설임의 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고리즘의 안내를 받은 그곳은 일단 어둡다는 것이 맘에 들었고, ‘뮤직 복싱’이란 프로그램이 있다는 게 마음을 확 잡아끌었다. 왠지 댄스 수업에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체험 수업을 1회 한 뒤 바로 3개월을 등록했다. 인생 운동을 찾았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복싱은 정말 나랑 잘 맞는 운동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기초 복싱과 뮤직 복싱을 섞은 프로그램인데, 1시간 구성이 알찼다. 스트레칭 5분, 줄넘기 5분, 기초체력 훈련(스텝 위주) 10분, 복싱 기술 배우기 20분, 뮤직 복싱 10분, 기초 체력 훈련(근력 위주) 10분으로 60분을 쉬지 않고 움직였다. 첫 주는 40분쯤 지날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2~3주쯤 지나자 60분을 꽉 채워 따라갈 수 있었다. 한 개도 못할 줄 알았던 줄넘기도 매일 하니 나중에는 3분 이상 쉬지 않고 뛸 수 있게 됐다.
귀청을 때리는 음악 소리와 코치님의 기합 소리에 지루할 틈이 없었고, 대부분 어두운 조명 아래 허공에 대고 손을 휘젓는 동작이 많아서 혼자 하는 운동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으니 은근히 경쟁심도 발동되었다. 가끔 스파링을 하면 승부욕이 치솟으면서 욕심 많고 활력이 샘솟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케이팝 댄스를 할 때는 거울을 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는데, 복싱장 거울에 비치는 나는 꽤 멋있었다. 가드를 올리고 기본자세로 서면 마치 아마추어 복싱 선수처럼 보이기도 했다.(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누구도 그렇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복싱과 나, 우린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뮤직 복싱은 복싱의 기초 동작을 음악에 맞춰 반복하는 건데, 아주 예전에 조혜련이 다이어트 비디오에서 했던 ‘태보(태권도+복싱)’가 떠올랐다. 댄스 음악은 안 그래도 빠른데, 더 빠르게 리메이크된 노래에 맞춰 잽을 날리고 어퍼컷을 올리고 스텝을 밟았다. 말도 안 되는 속도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됐다. 댄스 학원을 다닌 경력 덕분일까? 다른 사람들이 못 따라가는 스텝도 나는 어렵지 않게 됐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다음 노래가 나오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가끔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하는 트로트에 맞춰 이리저리 팔을 뻗고 있는 내 모습에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어느새 노래만 나오면 스텝과 펀치가 자동적으로 나오는 내 몸에게 감격하기도 했다.
복싱을 배운 뒤로 춤도 쉬워졌다. 몸이 가벼워져서 동작 전환이 빨라지니 훨씬 여유롭게 보였다. 체력이 생기니 힘들어서 구부정했던 몸도 펴졌다. 가장 큰 수확은 ‘머리 비움’이다. 복싱을 하는 내내 너무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샌드백을 쳐야 하고, 코치님이 외치는 펀치 루틴을 날려야 하고, 알람이 울리기 전까지는 그냥 뛰어야 했다. 머릿속이 하얘진다는 느낌조차 받을 새 없이 그냥 시키는 대로 몸을 굴리다 보니 어느새 루틴이 외워지고, 뮤직복싱 순서가 몸에 들어와 있었다. 드디어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 무엇인지 체득하게 된 것이다.
인생 운동을 찾았지만, 오래 하진 못했다. 겨우 7개월 만에 그만두었으니. 복싱하던 중에 약간의 부상도 있었고, 일이 늘어나 시간 빼기가 어려워진 것도 있으나, 가장 큰 이유는 고양이였다. 나는 네 마리 고양이의 집사다. 첫째 고양이의 병이 깊어져 복싱과 춤을 동시에 쉬게 되었다. 이후 춤은 다시 시작했으나 복싱은 여전히 가지 못하고 있다. 삶에 여유가 좀 더 생기면 꼭 다시 복싱을 시작할 것이다. 그땐 뮤직 복싱이 아니라 정식으로 천천히 제대로 배워서 먼훗날 강펀치를 리드미컬하게 날릴 줄 아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