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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쌤 Sep 12. 2024

누구냐, 넌?

♬BGM

IVE-I am     


다른 문을 열어 따라 갈 필요는 없어 / 넌 너의 길로 난 나의 길로 음

하루하루마다 색이 달라진 느낌 / 밝게 빛이 나는 길을 찾아

I'm on my way 넌 그냥 믿으면 돼 / I'm on my way 보이는 그대로야          



나는 자아가 충만한 사람이다. 물론 내 자신이 밉고 싫을 때도 수없이 많지만 그 감정이 30분 이상을 가진 않는다. 저지른 일 때문에 후회하고 이불을 차다가도 금세 숨이 가쁘고 다리가 아파서 오래 차고 있을 수가 없다. 나든 남이든 오래 미워할 체력이 나에겐 없다. 지난날에 대한 후회도 아주 짧은 편이다. 이미 저질러진 거 어쩌겠어? 되돌릴 방법이 없으니. 이렇듯 포기가 빠른 편이다. 난 도대체 왜 이것밖에 안 될까? 나 왜 이렇게 생겨 먹었지? 하고 머리를 싸매다가도 고양이 뱃살을 조몰락대거나 초코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면 어느새 헤헤 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댈 체력도 집중력도 없으니 자존감이 약해질 틈도 없다.

남들이 행복 비결을 물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홀딱 벗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자기를 뚫어져라 꼼꼼하게 관찰해 보세요. 짧으면 1분, 길게는 10분 만에 사정없이 자신을 미워할 수 있을 겁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신을 사랑하고 삶에 만족하려면 자기에 대한 관심을 끊으면 된다는 거다. 그 비법 중 하나가 거울을 자주 보지 않는 것이다. 거울을 아예 안 보고는 살 수 없다. 머리도 빗고 선크림도 발라야 하니까. 다만 흐린 눈으로 볼 뿐이다. 시력이 좋지 않아 꽤 뽀샤시하게 필터링이 된다. 안경을 썼을 때를 대비해 되도록 거울을 닦지 않는다. 뽀얗게 먼지 싸인 거울은 마치 안개 속에 있는 양 나를 한껏 신비롭게 만든다.

‘No Mirror No Pain’ 철학을 통해 자아존중감을 회복한지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나 또한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내 존재 때문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던 10대와 20대가 있었다. ‘나는 왜 이럴까?’,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하며 나라는 존재 때문에 일어나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렸다. ‘나’라는 모래지옥에서 차츰 벗어나기 시작한 건 고양이를 입양하면서부터다. 온 신경을 다 쏟아 부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귀여운 존재가 내 바깥에 생기니 감히 나 따위(?)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이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통해 그 생각은 더욱 굳어져 갔다.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자존감은 떨어진다. 나보다 내 바깥의 세계에 관심을 두고, 다른 존재를 들여다보려 애쓸수록 내 삶이 더 가치 있어졌다.     


나만의 개똥철학을 잘 지키며 꽤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던 나에게 “거울 보세요!”, “아니, 바닥 말고 거울 똑바로 보세요!” 하는 외침이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면 젖은 미역 같은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은 붉게 물든 얼굴이 보인다. 손가락과 어깨가 한없이 오그라든 걸 보아 매우 춥나 싶지만, 겨드랑이가 흠뻑 젖은 걸로 보아 그건 아닌 듯 싶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삐걱, 뚝딱뚝딱, 관절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아니 실제 무릎을 접었다 펼 때마다 두두둑 소리가 나고 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진짜 나라고?


댄스학원에 다니기 전엔 내가 과연 1시간을 서있을 수 있을까가 가장 걱정이었다. 몇 번 가보니 1시간이 생각보다 훌쩍 지났다. 힘들긴 했지만 아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잘하는 사람이 많아서 내가 민폐가 되면 어쩌나 했는데, 다들 초보여서 어려워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나는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는 학생이어서 몇 회 만에 안무 숙지가 가장 잘되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나에게 앞에 서라며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처음엔 젤 뒤가 내 자리였는데 점점 앞으로 옮겨져 선생님과 거의 같은 선에 서게 됐다. 그때부터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너무 잘 보였다. 안 보고 싶었던 내 모습이. 뒤에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가려서, 또 시력이 좋지 않아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에 내가 꽤 잘하는 줄 알았다. 선생님의 오른 쪽에 서니 그때서야 내 진짜 모습이 보였다. 아이돌 백댄서 출신 선생님 옆에 선 나는 막춤 추는 고라니처럼 보여서 우스꽝스러웠다. 웃음을 참느라 은은한 미치광이 미소를 띠며 춤을 추는 나는 겉으로 보기엔 꽤 춤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내 모습의 실체를 본 뒤부터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럼 선생님은 계속 고개를 들고 거울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천장을 봤더니 자빠진다고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한쪽 구석에 있는 에어컨과 눈싸움을 하며 춤을 췄다.

촬영은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었다. 선생님은 기록을 쌓아야 한다며 매번 촬영을 했다. 삼각대를 세워놓고 배운 데까지 추는 것이라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멀쩡히 잘하던 동작이 촬영만 하면 안 되는 것이다.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면접관 앞에 서는 기분이었다. 화질도 구린 저 핸드폰 카메라 따위가 나를 벌벌 떨게 만든다는 게 자존심 상했지만, “촬영할게요.”라는 말만 들으면 며칠을 땀 흘리며 외운 안무가 머릿속에서 깡그리 삭제됐다. 카메라는 나에게 영화 <맨인블랙>에 나오는 기억제거장치 ‘뉴럴라이저’였다.

더 열심히 하면, 노래만 들으면 몸이 막 움직일 정도로 그렇게 열심히 연습하면, 카메라 울렁증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전히 긴장되었고, 제대로 하다가도 한 번 틀리면 동작이 딱 멈춰버렸다. 거울에 비치는 나, 카메라가 응시하는 나, 애써 신경 쓰지 않고 피하려 했던 ‘나’와 정면으로 마주친 순간 어떡하면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만 한여름 모기처럼 머릿속에 왱왱 맴돌았다.     


좋지 않았다. 얼른 다시 충만한 자아로 돌아가야 했다. 이왕 자아에 대해 고민할 거라면 ‘비춰지는 나’가 아니라 ‘움직이는 나’에 집중하고 싶었다. 거울을 꼭 봐야 할까? 선생님이 거울을 보라는 의도는 너무도 잘 이해한다. 거울을 보고 동작을 점검하고, 어떤 각도와 포즈가 가장 좋은지 스스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겐 맞지 않았다. 나중엔 어떨지 몰라도 지금은 내가 움직이고 있음을, 땀 흘리고 있음을, 안무를 따라할 수 있음을 만끽하고 싶었다. 내 모습이 어떨 게 보일지는 상상에 맡기고 싶었다. 그래야 즐기면서 오래 춤출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울보기를 멈추기 위해서 자리를 살짝 옮겼다. 선생님의 동작은 매우 잘 보이지만, 내 모습은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 자리, 선생님 바로 뒤. 선생님은 내 마음도 모르고 자꾸 옆으로 조금씩 옮기면서 내가 거울을 볼 수 있도록 배려해주려고 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님 그림자처럼 뒤에 붙어 다녔다. 마음이 편해졌다. 진작 이럴 걸.

촬영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마스크를 쓰고 있다는 게 안심이 됐다. 굳어있는 표정까지 신경 쓰다가는 더 많이 틀릴 것 같았다. 영상을 보고 또 봤다. 손발이 오그라들어 멀리 두고 보거나 곁눈으로 봤다. 보기 싫어도 억지로라도 봐야 익숙해질 것 같았다. 다행히 수십 번을 보니 정면으로 볼 수 있을 만큼 적응이 됐다. 처음 배운 안무인 ‘다시 만난 세계’를 끝내고 1절 전체를 촬영한 영상부터 용감하게 SNS에 올렸다. 스스로도 보기 힘들어하는 영상을 SNS에 공개한 이유는 계속하고 싶어서다. 나는 의지가 매우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고 싶은 것이나 해야 할 것이 생기면 꼭 SNS에 올리거나 학생들 또는 독서모임 사람들 앞에서 말하곤 했다. 그럼 사람들이 “언제 해요?”, “하고 있어요?”하고 물어봐주니 억지로라도 결심을 지키곤 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공개했다.

결과적으로는 공개한 게 촬영 공포를 조금씩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잘한다는 말은 없었지만, ‘끼가 있다’거나 ‘동작이 몹시 정확하다’거나 ‘(그 나이에)대단하다’ 등등 응원의 댓글이 달렸다. 마흔이 넘어 무언가에 새롭게 도전한다는 것만 해도 어디냐고, 잘 못해도 계속 하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스스로를 토닥였다.

이후로도 잠시 정신을 놓고 있다가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치면 흠칫흠칫 놀라 얼음이 되어버리기 일쑤였고, 촬영할 때 단 한 번도 틀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핸드폰 갤러리 ‘댄스 앨범’이 하나둘 쌓이는 게 즐거워졌다. 마스크 속이 전혀 보이지 않지만, 나는 안다. 긴장되고 부끄러워 화가 난 듯 한일자로 입을 꾹 다물고 있지만, 가끔은 아이돌처럼 입술을 지그시 씹기도 해보고, 노래도 따라 부르고 있다는 걸. 연습 시간을 늘리면 틀리는 횟수도 적어진다는 것도 알게 됐다. 계속하다보면 언젠가는 거울 속 나와 듀엣 댄스를 추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카메라를 갖고 노는 날도 오겠지. 물론 ‘계속한다는’ 전제가 성립되어야겠지만.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지금은 거울 속 이 어색한 나와 멋쩍게 인사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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