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2NE1-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제일 잘 나가
내가 봐도 내가 좀 끝내주잖아
네가 나라도 이 몸이 부럽잖아
몸에 대해 신경 쓰지 말자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2주 만에 결심이 무너졌다. 수업이 끝나면 대부분이 남아서 추가 연습을 한다. 1시간을 전력 질주로 춤추고도 어디서 또 체력이 샘솟는지 놀라웠다. 온 힘을 짜내서 겨우 수업을 따라가고 나면 체력이 다 빠져서 운전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될 정도여서 첫 주는 마치자마자 도망치듯 집에 왔다. 그러나 내 목표는 사람들과 함께 연습하고 대형을 맞춰 촬영도 해보는 것이기에 2주차부터는 남아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안무 숙지가 되면 서로 개인 촬영을 해준다. 오래 다닌 분들이 주로 촬영을 해주는데, 춤출 때 쑥스럽지 말라고, “예~”, “호우~!”하며 추임새까지 넣어주신다. 천사 같은 분들. 그러나 나는 환한 조명 아래서 호응을 받으며 춤추는 게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래서 더 움츠러들었을까? 촬영된 내 모습은 처참할 지경이었다.
영 댄스학원에서도 촬영은 했다. 혼자 하는 건 아니고, 다 같이 춤추는 걸 선생님이 촬영해 주셨다. 화질이 좋지 않고, 멀리서 찍는 것이기 때문에 내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진 않았다. 그런데 조명 좋고, 가까이서, 화질이 좋은 카메라로 찍은 나는......
구부정한 어깨에 고개는 바닥을 향한 채로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고, 카메라가 의식돼서 안무는 다 까먹고 부끄러워서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진 나를 보니 얼굴이 빨개져서 영상을 끝까지 보지도 못한 채 지워버렸다. 노래는 ‘내가 제일 잘 나가’인데, 춤추는 사람은 쥐구멍을 찾아 숨는 생쥐 같았다.
집에 와서 안무를 만든 댄스 크루 ‘YGX’의 영상을 찾아보았다. 아, 이게 이런 춤이었구나. 가사 그대로 ‘내가 얼마나 잘 나가는 인간’인지 보여주는 춤이었다. 전진하고, 내밀고, 고개를 쳐들고, 팔다리를 크게 크게 휘젓는 게 안무의 핵심인데, 나는 천적을 만난 아르마딜로처럼 사지를 움츠리고 있었다. 몸으로 추는 게 아니라 얼굴로 추는 건가 싶을 정도로 표정도 다채로웠다. 어떤 때는 악동처럼 장난스럽게, 어떤 때는 왕처럼 자신만만하게. 얼굴에도 근육이 있다는 것이 실감났다. 거기에 비하면 나는 표정을 짓기는커녕 눈도 어디로 둘지 몰라 동공지진이 일어난 상태였으니 춤의 맛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내가 뭐 아이돌 될 것도 아니고, 무슨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닌데, 그리고 이 나이에 설렁설렁 몸이 움직이는 게 어디냐!” 하고 만족하면 될 일인데, 왜 나는 만족을 모르고 더 잘하고만 싶은 것인가.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다. 뭐든 앞장서고 싶었고 잘하고 싶었다. 연극을 하면 주인공이어야 했고, 장기자랑 반대표는 늘 나여야 했다. 반장이든 부반장이든 하나는 해야 했고, 운동도 공부도 노래도 글쓰기도 최고로 잘해야 했다. 6학년 때 ‘교내 기능 대회’라는 게 열렸는데, 나는 과학상자 만들기만 빼고 다 참가했던 것 같다. 노래, 그림, 글쓰기 등 참가한 여섯 개의 분야에서 모두 최우수상을 탔다. 학원 하나 다니지 않고도 나는 여러 분야에서 내 욕심을 채울 수 있었다.
식탐도 많았다. 아기 때부터 엄마 젖 양쪽을 다 먹고도 모자라 입 짧은 언니가 먹던 분유까지 다 뺏어 먹었다고 한다. 간식을 똑같이 나눠주면 언제나 빨리 먹고 언니 걸 탐냈다. 청소년기에는 옷이나 학용품 같은 물건 욕심을 냈고 괜찮은 남자애는 꼭 사귀어 봐야 했다. 어른이 되면서는 성과에 욕심이 났다. 입시 학원에서 일할 때 학생 설문조사로 강사 평가를 했는데 상위권을 차지한 것으로는 성에 안 찼다. 왜 1등이 아닐까 화가 났다. 학생들 성적으로 팀마다 평가를 낼 때도 내 팀이 1등을 해야 만족이 됐다.
대부분 좋은 욕심이라 괜찮은데, 문제는 노력하기는 싫다는 것이다. 노력은 조금만 하고 성과는 크게 얻고 싶었다. 노력을 안 했다는 건 아니지만, 늘 내 노력에 비해 좋은 성과를 얻어 온 게 사실이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재능과 감각 덕분이기도 하고 대부분 운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룬 것들이 늘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언제든 손바닥 위 눈처럼 사라질 것 같았고, 해온 일에 대해 칭찬을 받으면 왠지 사기꾼이 된 기분에 별거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곤했다.
케이팝 댄스를 배우면서 내가 가진 재능과 감각,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걸 드디어 만난 것 같았다. 이건 운으로 메울 수 있는 것도 없다. 꾸준히 해도 잘할 수 없을 거란 생각도 드니까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한 것 같아 더 속상해졌다. 벌써 40대 중반인데 꾸준히 할 수 있을 만큼의 시간도 없는 거 아닌가.
좌절에 빠져서 “10년만 젊었어도 이러지는 않았을 건데. 이래가지고 언제 잘할 수 있겠노.” 하고 꿍얼거리니까, 남편이 또 옳기만 한 말을 했다. “근데 니는 그 말을 왜 누워서 하고 있노.”
춤 연습할 거라고 제일 큰 방인 침실을 비우고 대형 거울까지 사서 연습실을 꾸며놓고는 거실에 드러누워 불만만 용처럼 내뿜고 있었다. 나이와 체력을 핑계대고 있지만, 마흔 살부터 나름 꾸준히 운동을 해왔고, 규칙적인 생활을 한 덕분에 사실 어느 때보다 체력이 괜찮은 편이었다. 10년 전엔 생활도 수입도 불규칙해서 불안감이 컸다. 결혼 후 가족과의 갈등과 새로운 지역에 적응하느라 취미 생활은 꿈도 못 꾸던 때였다. 내가 춤을 추기로 결심한 것도 드디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겨를이 났기 때문이니까. 늦은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때일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회귀 불가능한 10년 전 젊음을 그리워하며 누워서 투덜거릴 시간에 10분이라도 팔다리를 휘저어 보고 나이를 탓해도 탓해야 하지 않을까. 단단히 마음을 다졌다.
다음 수업이 끝난 후 단단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 따라서 1시간 추가 연습을 하고 왔더니 다음날 몸살이 나버렸다. 얼음 같이 단단했던 결심은 그세 녹아 뜨뜻미지근한 물이 되어 흘러가버렸다. 그때 인정했다. 내가 제일 잘 나갈 수는 ‘절대’ 없겠구나.
그렇다고 기가 팍 꺾여 그만둔다거나 한 건 아니다. 오히려 살짝 오기가 생겼다. 제일 잘 나가지는 못하겠지만, 내 눈에라도 만족스럽게 하려면 얼마만큼 노력해야 하는지 실험해 보자. 내가 지금껏 대충, 눈치껏, 운빨로 해왔던 것들처럼 하지 말고, 성실하게 노력해서 차근차근 쌓아보자. 그래서 결과를 얻었을 때 어떤 기분이 들지 약간 기대가 된다. 아마 지금까지와는 달리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나를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