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금고 선생님

수업 단상-대나무 숲이 되어줄게

by 고양이쌤

“선생님, 이건 비밀인데요. 선생님만 알고 계셔야 해요. 아빠가 출장 갔을 때 엄마가 남자 친구를 만났대요. 아빠가 그걸 알고 엄마한테 화를 냈어요. 어제 엄마랑 아빠랑 엄청 싸웠는데 무서웠어요.”


벌써 몇 년 전이다. 8살 아이가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당황해서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이는 엄마가 계속 울었다고 했고, 자기도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다독여주며 네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어른도 실수나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으니, 엄마와 아빠를 가만히 지켜봐 주자고 했다.


가끔 이렇게 아이들이 비밀을 털어놓을 때면 어떤 반응을 해주어야 할지 난감하다. 물론 아이들이 어떤 해결책을 바라고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아니다. 답답한 마음을 풀고 싶고, 또 기대고자 털어놓는 것을 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하고 외칠 대나무 숲이 필요한 것뿐이란 것을 안다. 그러나 비밀을 말한 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빛은 대화를 원하는 것이고, 난 어떤 방식으로든 답을 해야 한다. 15년 아이들과 함께 했지만 아직도 그게 어렵다.


아이들의 고통과 걱정이 내게로 전이되어 나 또한 많이 아프다. 10살 여자 아이가 문제집을 하나 틀릴 때마다 회초리를 맞는다며, 내가 공부를 못하면 엄마가 나를 미워할 거라며 펑펑 울었을 때, 나도 아이와 함께 울었다. 그날 밤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어머니께 아이의 마음을 정리해 전달했고, 어머니도 나도 함께 울었다.


그래도 이렇게 전할 수 있는 정도의 비밀이라면 괜찮다. 마음에 묻을 수밖에 없는 비밀들은 나를 계속 갉아 대서 가끔은 이 일을 그만두고 싶다. 유독 말을 듣지 않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10살 때 만나서 12살 때 헤어졌으니 3년을 꼬박 함께 했다. 책 읽고 토론하는 수업인데 책을 읽지 않고 올 때가 태반이었다. 2년을 지도해도 글쓰기는 늘 제자리였다. 어쩌다 시간이 맞지 않아 5학년 때부터는 혼자 수업을 받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자기 비밀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말이 아닌 글로.

“누나와 나는 아빠가 다르다. 누나는 대학생인데 방학이 되어도 집에 오지 않는다.”

“아빠가 엄마를 때렸다. 엄마는 괜찮다고만 했다.”

“엄마는 항상 일만 한다. 주말에도 일을 하니까 가족끼리 놀러 가 본 적이 없다.”


글을 읽을 때마다 뭐라 답글을 달아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그 애의 틀린 글자를 빨간펜으로 고쳐주는 것은 쉬웠지만, 다친 마음은 어떤 색깔로도 고쳐줄 수가 없었다. 몇 달 동안 집으로 글 쓴 걸 보낼 수가 없었다. 이런 글을 썼다는 게 부모님께 알려졌을 때 어떤 반응이 올지 겁이 났기 때문이다. 하루는 궁금했던지 어머니가 글을 보내 달라 연락이 왔다. 문제가 될 것 같은 부분을 빼고 보내려다 그냥 보냈다. 다음 주 아이가 오지 않았고, 아이도 어머니도 나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렇게 그 아이와 헤어졌다.


비밀을 듣는다고 해서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이의 고민은 대부분 부모와 관련된 것이라 더욱 그렇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돌려 돌려 부모에게 전달했는데 오히려 일이 커지는 경우가 많았고, “아이를 안 키워보셔서 잘 모르시네요.”하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그래도 가끔은 감사하다는 말을 듣는다. 선생님께라도 진심을 털어놓으니 안심이 된다며 잘 부탁한다는 말을 들으면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런 아이들은 아주 오래 내 곁에 있게 된다.


나는 그저 비밀을 듣고 지켜주는 비밀금고가 되어 줄 뿐이다. 비밀을 털어놓은 뒤 나를 더 친밀하게 생각하는 아이들을 보면, 그저 들어주는 것만도 큰일을 하는 거라고 나 자신을 다독인다. 또 매번 고통스러운 비밀만 듣는 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요.’, ‘부모님 몰래 아이돌 콘서트에 다녀왔어요.’하는 행복한 비밀도 많이 듣는다. 비밀을 비밀로 치유하며 오늘도 나는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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