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뉴로티피컬레이디 Oct 20. 2022

나의 카산드라 증후군 3편

네 남편이 아스퍼거 증후군이라고? 그럴 리가 없는데..

 남편이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것에 확신을 가지는 상담사의 이야기를 듣고 저는 바로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해서 알아보기 시작했습니다. 2017년 당시, 한국어로 된 성인 아스퍼거 증후군, 성인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자료는 거의 전무했습니다.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한 자료조차도 많지 않았는데, 찾더라도 미성년의 경우 진단과 행동 교정에 대한 내용이었고, 대부분이 한의원이나 클리닉의 광고글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명 '치료' '완치'라는 것이 될 수 없는 발달 장애를 두고, '아스퍼거 증후군 치료는 어떻게 하나요?' '아스퍼거 증후군 완치될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전하며 광고를 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설명이 되는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제가 도움을 받은 거의 모든 자료는 영어로 된 자료들이었습니다. 


 상담사의 말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모든 내용들이 제가 결혼 생활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잘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아무도 이해해 주거나 공감해 주지 않았던 이상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설명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느꼈던 답답함과 외로움, 해결되지 않은 정서적 갈등으로 인해 쌓이고 쌓여 폭발하기 직전이었던 괴로운 마음도 과장되거나 거짓된 것이 아니라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미치거나 이상하거나 예민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그 동안 그 누구도 이러한 어려움을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것에 서러움이 폭발했습니다. 


 뉴로 다이버스 커플에서 정형인인 배우자가 느끼는 이러한 상태를 흔히 '카산드라 증후군'이라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인 '카산드라'는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았지만, 그의 사랑을 거절한 대가로 설득력을 빼앗긴 불행한 예언자입니다. 트로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 놓아서는 안 된다는 그녀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트로이는 결국 멸망하게 되는데요. 미래를 예언할 수 있기에 사람들에게 이를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자 그녀는 점점 미쳐갑니다. 뉴로 다이버스 커플에서 정형인 배우자가 겪는 고충은 뉴로 다이버시티를 겪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거나 이해받기 매우 어려운 부분입니다. 따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그 말을 믿어 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고립감, 답답함을 느끼게 되고 이를 그리스 신화의 인물 카산드라가 겪은 고충과 비슷하다고 하여 '카산드라 증후군'이라고 칭하게 된 것이지요.


 최근 자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어린 나이에 진단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이 사회에서 여전히 자폐인들은 다수가 아닌 소수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정형인들 간의 소통을 기준으로 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아가며 겪은 관계 또한 정형인들 간의 관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혹시 살아가며 자폐인을 만났을 가능성도 있지만, 고기능 자폐에 해당하는 아스퍼거인들의 경우 이러한 일반적인 정형인들 간 관계를 위해 필요한 사회적 기술들을 인지적으로 습득하며 성장합니다. 때문에 직장, 친구, 학교 등과 같이 깊은 이해나 교류를 요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사회적 교류를 요하는 상황에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국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폐인과 뇌신경학적인 차이를 느낄만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일이 없는 것이지요. 제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부모님과 남동생 같은 가족들 뿐 아니라, 주변의 친한 친구들 모두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었죠. 

 때문에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에 대해서 알게 되기 전, 제가 제 남편과 겪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제 주변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남자들이 원래 다 그렇게 좀 공감 능력이 떨어지잖아. 네가 좀 예민한 부분도 있지 않을까? 네 남편 엄청 순한 사람처럼 보이던데" - 친구A
"원래 네 성격이 좀 예민하고 너도 보통 성격이 아니잖아. 자꾸 싸우는 건 둘이 똑같아서 그런거야. 자꾸 네 남편 탓만 하지 말으렴. 네가 성질 좀 죽여야 할 때도 있는 것 같구나. 넌 어릴 때부터 네 마음대로 안 되면 난리를 치고 그랬어." - 엄마
"말이 잘 안통해서 답답하다고 하는데 내가 전번에 네 남편이랑 이야기해 보니 네가 걱정하는 것만큼 잘 이해를 못하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더라고. 네가 먼저 이해해주고 좀 맞춰주려고도 하면 관계가 나아지지 않을까?" - 친구 B
"내가 볼 때 네 남편 엄청 정상 같은데... 네 말처럼 이기적이거나 답답한 사람이라는 생각 한 번도 안 해봤어. 야 내 남편은 더해. 남자들이 다 그렇지 뭐" - 친구 C


 남편이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도 주변의 공감을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남편이 사는 나라인 호주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처음 호주에 왔을 때 알게 된 남편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제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기에 그 친구들에게 고민 상담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남편을 알던 친구는 좀 조용하고 내성적이기는 해도 별 문제 없이 학교를 다니고 대학을 졸업해 멀쩡히 직장생활을 잘 하고 있는 남편에게 아스퍼거 증후군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제 남편은 절대 그런 발달장애가 있는 사람일리 없고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지내며 한 번도 이상하다고 느끼거나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었죠.


 물론 제 입장에서는 답답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었지만 사실 아스퍼거 증후군은 결혼 전 연인 관계에서조차 정확히 파악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 번 언급한 것처럼 아스퍼거인들은 뛰어난 학습 능력으로 부족한 사회적 스킬들을 보완하는 법을 배우고 특정 상황들에서 이를 사용해서 정형인들 사이에서 적당히 어울리는 기술들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교류를 자연스럽게 하는 정형인들과 달리 아스퍼거인들의 경우 이에 굉장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게 됩니다. 때문에 많은 아스피들이 성공적으로 사회 생활을 하더라도 집에 오면 가족들과 교류를 거부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매우 일반적인 뉴로 다이버스 커플의 특징으로 결혼 즉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돌변해서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식은 것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언급되는데요. 늘 가면을 쓴 생활을 유지하기 어렵고, 연애 시절과 달리 상대방이 '특별한 관심사'가 더 이상 아니게 되는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 즉시, 아스피들은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피곤하고 긴장되는 사회적 스킬을 사용하는 것을 그만 두고 본연의 모습대로 행동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자폐처럼 보이지 않을 뿐더러, 만약 자폐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폐인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때 겪는 소통 부재, 고립감, 외로움(특히 여기서 깊은 관계는 오래된 연인이나 배우자처럼 서로에 대한 깊은 이해와 배려가 관계의 핵심이 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단순히 서로 해를 끼치지 않고 일만 같이 잘 하면 되는 동료 관계나 같은 반 친구로 적당히 어울린 관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물론 친구나 동료라도 더 깊은 인간관계로 발전한 경우에는 소통의 문제를 느낄 수도 있겠지요.)에 대해서는 겪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뉴로다이버스 커플의 정형인 배우자가 말하는 고충은 도대체 말이 되지도, 이해가 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저는 카산드라처럼 점점 미쳐가고 있었습니다. 제 말을 믿거나 이해하거나 인정하거나 공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어느 시점에는 되려 제 스스로가 의심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남편과 소통을 원하는 것 자체가 내 주변 사람들 이야기처럼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너무 예민하게 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지금껏 결혼에 대해 제가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마저 흔들렸습니다. 조건이나 다른 부분들보다는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며 함께 늙어갈 수 있는 배우자를 찾아 결혼하고 싶었던 제 바램이 너무 우습게 무너졌습니다. 이래서 사람들이 결혼은 사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인지, 그래서 조건을 보고 결혼 하는 경우들이 많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그게 맞는 것인지 혼란스러웠습니다. 마음이 너무 괴로운데 그 마음이 드는 것조차 맞는 것인지 헷갈렸습니다.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을 알기 전, 저는 카산드라처럼 제가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절규했지만, 아무도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남편의 아스퍼거 증후군을 알게 되었지만 공식적인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주변 사람들은 이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인정한다 한들 제가 느끼는 것들이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심 가득한 피드백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뉴로다이버스커플이나 카산드라 증후군에 대한 자료들을 읽고 찾아볼 때면 이것이 실재하는 것이고 분명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에 큰 안도감이 들었습니다. 적어도 나는 미친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뉴로 다이버스 커플에서 카산드라 증후군은 외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만 일어나는 문제는 아닙니다. 아스피들은 자신의 기준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경향이 정형인들보다 매우 강하고 이에 벗어나는 의견을 수용하는 것을 어려워 합니다. 따라서 결혼 생활의 많은 부분들에서 정형인 배우자의 의견을 존중하거나 듣지 않고 자신의 입장대로 끌고 가기를 원하고, 이에 벗어나는 경우 함께 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매우 불편함을 느끼고 심한 경우 멜트다운을 보이기도 합니다. 멜트다운은 심각한 경우 폭력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므로 정형인 배우자에게는 매우 큰 정신적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결혼 생활의 수많은 순간, 아스피 배우자의 입장이 강요되고 정형인 배우자는 자신의 입지나 의견을 점점 잃어가게 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스라이팅이 일어나기도 하고 정형인 배우자는 자신의 믿음, 선호, 취향, 의견 등등에 대해 점차 힘을 잃어가게 됩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부분을 통틀어 뉴로다이버스 커플 속 정형인이 겪는 정신적인 문제들을 '지속적인 트라우마적 관계 증후군 (On-going Traumatic Relationship Syndrome)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가장 가깝고 친밀한 관계에서 응당 주고 받아야 하는 상호적 교류의 부족, 감정적 고립감, 아스피 배우자의 필요에 맞춘 삶의 방식 변화, 배우자를 부모처럼 돌봐야 하는 장기적 상황 등... 역기능적인 관계에서 정형인 배우자는 늘 낮은 단계의 트라우마가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가게 되면서 우울증, 무기력감, 극심한 스트레스, 불안 등에 시달리게 됩니다. 


 정형인 배우자 입장에서는 아스퍼거 증후군이 무엇인지 최대한 배우고, 뉴로다이버시티가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문제의 근원을 마주하고 객관화 시켜서 바라보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것처럼 말이죠. 물론 그 트라우마적인 상황이 계속 지속된다는 점이 더 어려운 부분이지만, 그 실체가 무엇인지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것이 그 트라우마에 잠식되지 않고 이를 이겨낼 수 있는 답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