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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쟁이연어 Oct 22. 2022

무진장 오피스텔 408호

(50대, 인생을 바꾸는 100일 글쓰기)


사무실을 구하려고 강남 일대를 이 잡듯이 뒤진 창식에게 뒷골목에 쓰러져가는 허름한 사무실조차 발길을 돌리게 한다. 담스러운 임대료 때문이다. 벌써 사흘째 알아보는 중이다. 창식은 테헤란로에서 화사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모닝커피를 마시고 경제신문을 보며 시작하는 하루를 꿈꿨다. 사업 로 배우다 현실과 마주한 후부턴 자존심이 너덜대고 있다. 책상 하나 놓을 공간도 쉽사리 내주지 않는 강남허들은 생각보다 높았다.


똑같이 사람 사는 동넨데 남은 쥐똥만 한 사무실도 왜 그리 비싼 거? 어디 금테라도 둘렀나 보지..” 심술이 난 창식은 애꿎은 고교 친구 만수를 불러내서 화풀이를 하고 있다.


“그러게 뭐 하러 비싼 강남땅에 사무실을 얻? 돈도 없는데 강남에 있을 필요가 있나.” 만수의 말을 듣던 창식은 답답 듯 손가락을 허공 찌르 호기롭게 말을 이어간다.


“월급쟁이가 뭐를 알겠냐? 그래도 명함에 주소가 강남땅으로 딱하니 박혀있어야 거래처도 쉽게 뚫리고, 있어 보이는 거라고”  그런 창식을 보고 있자니 만수는 십 넘어 사업을 한다는 녀석의 말치곤 겉멋이 잔뜩 들어갔다는 생각을 한다.


“솔직히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  형편에 맞춰 다가 나중에 돈 벌어 옮겨도 늦지 않.. 그래도 정히 강남에 사무실을 얻어야 한다면 추천할 지역이 있긴 하지..”


지난 밤늦도록 먹은 술 때문에 아침까지 속을 겨워내던 창식은 몸이 몹시도 부대꼈지만 점심때 강남구 수서라는 곳을 돌아보기로 맘을 먹었다. 그곳은 강남 중심지와 가깝고 벤처타운이 몰려있어 자잘한 사무실들이 많다고 어젯밤 친구  일러준 곳이다. 간밤의 술자리가 세세히 기억나진 않아도 가격이 싸다는 말만큼은 창식의 귀에 쏙 하다.


수서역에 내려 도 풀 겸 황태 북엇국을 먹고 나온 창식은 식당에서 제일 먼저 눈에 는 부동산 사무실로 들어다. “한 스무 평정도 크기에, 싸고 깨끗한 사무실이 있을까요?” 빼곰이 문을 열고 들어온 창식을 보고 짜장면을 먹다가 황급히 일어선 장이 자리를 밀치고 다.


“그럼요. 수서동은 벤처타운이라 사무실이 많아요. 하지만 싸고 좋은 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니까. 있다고 하는 사람, 그거 다 거짓말인 거 알죠. 좋은  그만한 비용을 반드시 지불해야 순리 아니겠어요 하하


‘그만한 비용이라고..’ 창식은 장이 참 오지랖도 넓다는 생각을 한다. 그거까지 왜 자기가 평가한담..


“한 군데 보여줄 곳이 있긴 한데.. 여기는 시세보다 월세가 십만 원이나 저렴해요. 그리고 전망 확 뚫려있어 속이 다 시원하다니까.. 그런데..”


뒷말을 흐리는 부동산 장을 다그치기라도 하듯 되물었다 데요.. 뭐가 문제라도 있다는 건가요. 전망 좋고 싸다는데 야 더 바랄 게 없지요.. 거기 당장 보여 주세요”


앞뒤 안 가리는 성격의 창식은 일단 눈으로 봐야 직성이 풀렸다. 눈치를 보듯 이내 사장이 말한다. “하지만 그 오피스텔 주인 할머니의 조건은 이곳에 들어오는 세입자 반드시 일 년 동안 '새벽 여섯 시에 출근해서, 저녁 일곱 시에 퇴근'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만약 그 약속을 어기면 보증금 만 원을 돌려주지 않는 특약이고요.” 


창식은 참 해괴한 소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저렴한 월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내세운 오피스텔 주인과 며칠 뒤 부동산에서 만났다.


“죽은 우리 남편이 평생을 돈 번다고 꼭두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뼈가 부서져라 일했소.. 이제 단풍구경이라도 갈만해지니 그놈의 몹쓸 병이 와서 나만 놔두고 영감탱이 먼 가버렸지 뭐야.. 이 오피스텔도 우리 영감이 생전에 돈 벌어서 장만한 거라고.. 강남에도 번듯한 건물을 두 채나 해놓았다니까..” 할머니의 소설 같은 인생사가 펼쳐진다. “아 예 할아버지가 참 훌륭한 분이셨네요” 창식은 연신 비굴한 웃음을 지어댔다. 그리고 할머니의 비위를 맞춰서 입주해야겠다는 생각에 최대한 몸을 낮추며 말을 건넨다.


“근데 죽은 양반이 항상 그랬거든. 부지런한 놈은 엄동설한에 내쫓도 지 밥은 어먹고 산다고... 특히나 요즘 젊은 들은 일부러라도 고생을 해봐야 해.. 그게 남편의 신념이자 이 할망구가 받들어야 할 유지 같은 거였어.. 흑흑.. 이제 내가 왜 뜬금없는 조건을 내걸었는지 알겠소? 난 돈보다도 우리 영감의 젊은 시절을 보고 싶다오.. 사무실 입구에 출퇴근 기록기는 달아놨어.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면 보증금은 내 거야!”


창식은 어쩌면 주인 할머니가 늙고 사악한 사기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은 생각보다  잘 들고 풍도 좋아 창식의 마음에 쏙 들었다. 처음 한 달 동안은 곧 전도유망한 벤처기업의 CEO가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일은 애당초 사업계획서 안의 장밋빛 플랜처럼 돌아가지 않다. 어렵사리 뚫어놓은 거래처는 가격을 후 들어오는 경쟁업체의 농간으로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납품한 물품대 수금이 되질 않아 운영에 애를 먹었다. 스트레스가 쌓여 가는 와중에 입주 조건으로  출퇴근 시간을 지키느라 몸은 소금 절여 논 배추가 되었다. 애당초 말도 안 되는 약속을 돈 몇 푼 아겠다고 선택한 자신에게 부아마저 치밀었다. 하지만 더 이상 자금 융통할 수도 없는 창식에겐 보증금마저 날린다는 건 최악이었다. 보증금을 사하려면 술을 먹어도 목이나 한잔 겨우 축일 수밖에 없었다. 아침 여섯 시 출근 도장을 찍기 위해서 잠이 안 와도 자야 되고 새벽이 되면 일단 집에서 나와야 했다. 안 그래도 머리 아픈데 이런 것까지 구속되는 게 화가 나 빨리 계약이 종료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일 년이라는 시간은 정글에 내몰려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겐 몇 날 며칠처럼 짧은 시간이다. 그렇게 창식에게도 한순간처럼 지나간 365일이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3번의 아침 9시 출근과 2번의 오후 5시 퇴근으로 입주조건을 채우지 못했다. 그게 사무실의 계약기간이 종료되었고 불행히도 만 원의 보증금을 날리게 되었다. 다시 부동산 사무실에서 만난 주인 할머니는 계약기간을 연장하겠냐고 물어왔다. 그리고 만약 사무실을 계속 쓰려면 보증금 만 원은 새로 내놔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식은 그런 주인 할머니가 밉지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 사업 시작했지만 그래도 자리를 지켜준 건 웃기게도 그 약속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로 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근면함이 몸에 붙어서 한 발이라도 더 뛰게 되었다. 덕택에 새롭게 거래처도 늘어고 신용도 쌓였다. 여기저기서 일감이 몰리다 보니 나름대로 자리도 잡게 되었다.


“네.. 다시 연장해요.. 할머니.. 세상은 일근천하무난사(一勤天下舞難事) 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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