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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이스 Jan 08. 2020

누가 아이 없는 여자에게 돌을 던지나

얼마 전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초대를 받았다. 만남이 길어졌고, 그 댁에서는 손님인 우리에게 이탈리아산 올리브유를 선물로 주셨다. 마음이 텁텁했다. 이 올리브유를 어쩌나 하다 문득 오래전 일이 생각났다. 


때는 십 년 전쯤, 남편은 시어머님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해외에 거주하시는 친척 할머니께서 한국에 오셨는데 남편의 선물을 사 오셨다고 찾아가 보라는 전화였다. 며칠 후 남편과 나는 할머님이 머물고 계시다는 한 호텔로 찾아갔다. 그때가 그 친척분과 두 번째 만남이었고 남편의 외가 쪽 친척으로 시어머니와는 가까운 사이셨다. 

어릴 때부터 남편을 아끼셨다고 했다. 할머님께서는 남편을 위해 선글라스를 사 오셨다. 남편은 감사인사를 드리고, 우리는 근처 카페에서 차와 빵을 먹었다. 남편이 잠깐 전화를 받으러 일어난 사이 나에게 예상치 못한 화살이 날아왔다.

“너는 결혼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러고 있니?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내게 그 자리는 그다지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다. 형식적인 안부나 인사를 나누는 정도의 대화가 오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자리였다. 할머님과의 대화는 급작스럽게 깊어졌다. 잠시 당황했던 나는 이내 말씀하시는 뜻을 이해했다. 어른 들과의 대화는 늘 그렇듯 대답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편은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왔고, 할머니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화한 얼굴로 남편과 대화를 이어 가셨다. 

나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그러다가 남편이 또다시 전화를 받기 위해 자리를 뜨자, 할머니께서는 내게 2차 공격을 감행하셨다. 

“네 시어머니가 아무 말 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답답해서 나선다. 얼른 애를 낳아야 할 거 아니냐.” 


나는 말없이 침만 삼켰다. 그 질문은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때 유명하다는 한의원을 다니며 임신에 좋다는 한약도 먹고 있었고, 뜸이며 침이며 아이를 갖기 위해 좋은 상태를 만든다며 애를 쓰고 있었다. 아이 낳기를 미룬 것이 아니다. 원했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있을 뿐이었다. 시어머님과 대화하기 쉬운 주제도 아니라 말씀드리지 않았을 뿐이다. 결국, 나는 대답 한 마디 못했다. 남편이 다시 돌아오자 할머님께서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 가셨다. 나는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몸이 떨려왔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상황을 모르는 남편 앞에서, 게다가 두 번째 만나는 할머님께 내 감정을 분출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깔끔하게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그제야 눌렀던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눈물은 차오르는데 버스 안이라 마음껏 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눈물을 누르고 누르며 집으로 왔다. 


왜 난임이나 불임의 요인으로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는 외면당할까. 아이가 없는 것이 불가항력의 상황일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 왜 질문받지 못하는 걸까. 사실 나를 가장 화내게 했던 생각은 ‘왜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을까’였다. 그렇게 나는 종종 그때의 감정을 되새김질하며 보냈다. 


얼마쯤 지났을까. 명절이 되어 시댁에 갔다가 어머님께서 유럽산 올리브유를 주셨다.

“그 할머니가 보내신 거야.”

내 영혼 깊이 화살을 꽂으신 할머님과의 사건이 떠올랐다. 그때의 기억이 깨어나 마음이 요동쳤다. 집으로 돌아와 올리브유를 싱크대 깊숙이 넣었다. 그 올리브유를 한 방울이라도 입안에 가져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났던 것 같다. 나는 심한 주부습진을 위해 집에서 비누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가 싱크대 구석에서 잠자고 있던 올리브유를 발견했다. 유통기간이 지난 올리브유는 얼마 후 비누로 다시 태어났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사람과, 할 수 없어서 못하는 사람의 간극은 어마어마하다. 할 수 없어서 못하는 사람에게, 할 수 있으면서 안 하고 있느냐는 비난은 정당하지 못하다. 틀린 질문에는 대답할 수 없다. 할 수 없는 이들에게 왜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더더욱 그 답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질문이라 할지라도, 듣는 이를 깊은 압박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말이라면 그것은 폭력과 다를 바 없다. 난임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아무리 작은 비난의 돌멩이라도 날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할 수 없기 때문에 못하는 것뿐이다. 간절한 이들에게 더 이상 잔인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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