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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v Jun 06. 2023

핑크 카드

아비와 여러 감정들

걷는 아비

아비(하성이가 스스로를 부르는 애칭)는 남자아이라 그런지 과격한 행동을 할 때가 있다. 아비의 과격한 행동은 소리를 지르거나, 누나를 강하게 밀기도 하고 또 때로는 물건을 다른 곳으로 막 던지는 식이다. 조절이 안 되는 그런 행동들은 주로 자기가 원하는 걸 하지 못하게 될 때 나온다. 예를 들면, 누나하고 노트북으로 영상을 보다가 누나가 고를 차례가 되었을 때, 아비는 자기가 보고 싶은 영상을 슬쩍 말해본다. 근데 그걸 누나가 선택하지 않으면 큰 소리를 낸다. 나와 아내는 그런 아비의 행동들이 연년생 동생의 생존본능 때문인지, 5살 아이가 겪는 불균형 때문인지, 남자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종의 폭력성(?) 때문인지, 그냥 졸려서 그런 건지 고민이 깊다. 다툼이 생겨났을 때는 그 자리에서는 해결이 어렵기 때문에 아비를 포옥 안고 바람을 쐬러 집 밖으로 나간다. 나가자마자 아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싱긋 웃어 보인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뭐랄까, 어떤 감정들이 아비를 훑고 지나간 느낌이랄까.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엄마 없이 아이들을 태우고 하원하던 길이었다. 아비는 갑자기 안 되는 줄 알면서 안전벨트를 풀고 싶다고 말하고, 또 갑자기 엄마를 데리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그냥 안아달라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가 울고 싶을 때는 울게 그냥 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해서 울음을 억지로 멈추게 하지 않는다. 나는 한참을 우는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고만 있었다. 다행히 그날은 전날 밤에 봤던 훈육에 관한 영상이 도움이 되었다. 아이에게 '단호하게 알려주는 것'과 '강압적인 태도로 아이에게 말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 영상이었다.

  * 단호하게 알려주는 것은 아이의 행동만을 교정해 주는 것이다.

  * 강압적인 태도로 말하는 것은 아이의 행동뿐만이 아니라, 아이가 현재 보이는 감정, 태도 그 밖의 것들

    까지 모두 교정해 주려는 것이다.

나는 울고 있는 하성이에게 말했다.

"하성아. 아빠가 지금은 운전하고 있으니까 안아줄 수가 없어. 그러니 안전하게 앉아 있어야 해. 그리고 지금은 엄마를 데리러 가는 시간이 아니야. 대신, 울고 싶으면 울어도 돼."

아비가 아빠 말을 들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아비는 아빠 손을 꼭 잡고 울다가 잠들었다. 아이얼굴에 있던 눈물 자국과 내 손밑에 있는 조금만 아이의 손을 보다 보니 울부짖던 아이의 소리가 내 귀에 다시 들렸다.


"아빠. 지금 나한테 또 이런 감정들이 찾아왔어요. 근데, 나는 이 감정들을 조절할 수가 없어요. 도와주세요."


그날 밤, 늘 그렇듯이 발에 로션을 발라주고 아비와 함께 나란히 잠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의 경험에 스토리를 입혀서 기억한다.'는 걸 떠올리며 아비와 잠자리 대화를 나누었다.


"하성아. 오늘 하성이가 여러 번 소리 지르고 아빠에게 카드 받았었지?"

"응."

"근데, 아비가 소리 지르는 거는 하성이도 모르는 커다란 감정들이 찾아와서 그런 거야. 하성이 마음의 크기보다 더 큰 감정들이야."

"아. 그래서 아비가 소리 질렀던 거야?"

"응. 그러니까, 조절이 힘들 때는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돼. 알겠지?"

"응."


아비는 그날의 경험에 어떤 스토리를 입혀서 기억할까? 그리고 정말 다음번에도 아비는 차분하게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을까?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하나의 규칙을 만들었었다. 소리를 지르는 수준의 행동은 옐로카드, 물건을 던지거나 누구를 때리는 행동은 레드카드를 부여하는 것이다. 카드는 무조건 아빠만 부여할 수가 있다. 옐로카드는 내가 아이를 못 움직이게 포옥 안고 열을 세고, 레드카드는 스물을 아이와 같이 센다. 아이들은 아빠 품에 안겨서 못 움직이는 그 상황이 재미난 지 카드 받는 걸 좋아한다. 또 흥분했던 마음이 숫자를 세면서 가라앉기에 카드부여는 효과가 좋다. 문제는 최근 들어 아빠가 카드를 부여하는 횟수가 잦아진다는 것이다. 새로운 규칙이 필요한 시점이다.


"하성아! 하임아! 아빠가 옐로카드와 레드카드 말고 새로운 카드를 만들려고 해. 이름은 핑크카드야!"

"오!! 그게 뭔데?"

"옐로랑 레드카드는 아빠가 주는 거잖아? 핑크카드는 하이미랑 아비가 아빠에게 쓸 수 있는 카드야. 언제 쓰냐면 마음에 충전이 필요할 때 아빠한테 핑크카드를 내밀어. 그럼 아빠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하던 걸 멈추고 이렇게 웃으면서 꼭 안아줄게! 그리고 일곱을 세는 거야!"

"우와!! 그거 같이 만들자!"


아이들이 아빠에게 핑크카드를 내밀어서 도움을 요청하는 걸 연습해두면, 진짜 마음에 진정이 필요한 순간에도 카드를 내밀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이들은 소리 지르고 때리는 행동을 해서 아빠에게 카드를 받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때로는 자기 마음을 조절하기 위해 카드를 내밀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라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빠도 아이들이 핑크카드를 내밀었을 때, 억지로라도 웃으면서 아이를 안아주고 마음을 새롭게 정돈할 수 있지 않을까?


핑크카드가 짊어진 짐이 제법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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