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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쓰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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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ov Apr 12. 2024

아빠를 회고하다

그리스도인의 편지

내 아버지는 경찰이셨다. 아버지의 직업은 가족들에게 안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을 초대한 후, 교단에서 간단히 말씀을 듣는 시간이 있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 우리 아버지는 경찰제복을 입고 학교에 나타나셨다. 나는 아빠를 자랑스러워했다. 아빠는 아마도 승승장구 했던 것 같다. 명절이면, 우리 집 앞에서 과일박스를 건네 주러 오시던 분들이 기억이 난다. 출근 준비로 바쁘던 아침에 다급한 전화가 자주 울렸었다. 아빠를 찾는 전화였다. 대부분 아빠를 알고 있던 어느 분이 어디에서 사고가 났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던 전화였다. 급할 때 찾는 사람이였다. 그러던 아버지는 내가 중학생일 때 경찰공무원 집단에서 나오셨다. 재판에까지 회부가 되었던 것 같다. 최종 판결은 아빠가 제복을 벗는 것. 그때 당시 엄마는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아빠가 퇴직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해주었다. 소속감이 사라진 아버지는 많이 힘겨워하셨다. 명절이 되어도 누구하나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에 울리던 전화벨소리도 역시 고요했다. 아빠 주변에는 하나둘씩 사람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집 안 어느 방에서 옆으로 누워있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다음 걸음을 준비하지 못한 채로 맞이한 변화에 엄마도, 아빠도 어찌할 줄을 몰라했다. 당연히, 나도 누나도 할 수 있는 게 그다지 없었다. 때마침 아빠에게 사업제안이 왔다. 외삼촌은 강아지 간식 사업을 구상중이었는데, 공장을 차려서 같이 해보면 어떻겠냐며 손을 내밀었다. 아빠는 모아둔 돈과 대출을 끌어모아서 외삼촌과 사업을 시작했다. 이름은 ‘냠냠쩝쩝’. 처음에는 불티나게 팔렸다. 지금이야 애견 사업이 대중화되었고, 강아지들이 먹는 제품들도 워낙 다양하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강아지 간식은 희소성이 있었다. 아빠가 지나가던 강아지에게 차 트렁크를 열어서 그 ‘냠냠쩝쩝’을 건네곤 했던 게 기억이 난다. 엄마도 아빠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아빠는 엄마가 해주던 밥을 너무도 좋아했다. 엄마는 점심때 맞추어 아빠도시락을 한 보따리 싸서는 공장으로 가는 게 새로운 일상이었다. 다만, 엄마의 그 새로운 일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멈춰버렸다. ‘냠냠쩝쩝’에 곰팡이가 발견되었고,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급작스러운 고객들의 환불요청과 남아있는 재고 거기에 수습이 어려운 공장상황들이 더해져 아빠는 회생이 불가능했다. 우리는 빚더미에 떠앉았다. 평생을 공직에 있었던 사람이 사업을 하려니 쉽지 않을 게 당연하기도 했다. 우리 가족이 지나야 했던 어두운 터널의 시작점이기도 했다. 나는 한 살씩 나이가 들었고 아빠에 대한 분노도 함께 쌓았다. 이 상황을 해결하지 못하는 아빠가 미웠다. 엄마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아빠가 경찰 제복은 벗었지만 그 제복의 뻣뻣함과 제복에 담겼던 우러러보는 시선들, 아빠의 자존심까지는 벗지 못한 것 같았다. 답답했다. 우리는 여러 번 이사를 다녔고, 타고 다니던 차도 팔았다. 집에 빨간 딱지가 붙는 건 당연했고, 어느 날에는 돈을 빌렸던 아저씨가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무어라도 도움이 되어볼까 하교 후에 처음 만난 그 아저씨에게 마실 거라도 드렸는지 괜히 물어봤었다. 아빠는 깎이고 깎였다. 든든한 지원군이었던 엄마도 답답한 상황에 지쳐갔고, 평생 남에게 피해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고, 싫은 소리 한번 못하는 성격인데,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당장 막지 않으면 안될 것 같으니까. 독촉장이 오면 심장이 떨렸을테니까. 지금 떠올려보면 엄마는 다음날 아침이 오는 게 참 무서웠을 것 같다. 막막한 하루가 또 시작되는 삶이었다. 그래도 엄마는 아빠를 놓지는 않았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긴 시간 우리 가정을, 아빠의 마음을 만지셨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의 평판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던 것에서 천천히 자유로워지셨다. 아빠는 집에 있는 시간 보다 밖에 있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갔다. 언젠가 한번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누가 아빠한테 알려주더라. 주변에 사람들이 다 떠나고, 답답한 상황일 때 산에 오르라더라.”     

그때의 아빠는 길고 긴 터널을 나름의 방법들로 지나가고 있었고, 지금에 와서야 아빠의 걸음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을 주관하셨다는 것의 증거는 명확했다. 우리는 한번도 굶지 않았다. 어찌보면 때마다 시마다 잘 챙겨 먹었다. 한번은 정말 쌀도, 라면도 다 떨어져서 그날의 저녁을 어떻게 해결할 까 전전긍긍하던 날이 있었다. 그 때 중학교 때 내가 쓰던 수첩을 우연히 들쳐본 건 주님의 은혜였다. 수첩 안에는 짧은 메모와 함께 만원짜리 한 장이 껴 있었다.      

‘나중에 언젠가 필요할 때 이걸 써야지!’     

우리는 보물을 발견한 것 마냥 환호성을 질렀다. 그야말로 만원의 행복. 돌이켜보면, 그때 아빠가 제복을 벗지 않았더라면 아빠의 제복은 더욱 뻣뻣했었을 것 같다. 제복의 목 주름도 더욱이 날카로웠을 것이고, 그 날카로움은 아버지도, 남에게도 상처를 줬을 수도 있다. 외삼촌과의 사업이 쫄딱 망한 것도, 망하지 않았더라면 아빠 혼자 산에 오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더욱 찾지 않았을 수도 있다. 긴 터널을 지나와서일까 아빠는 어느새 넉넉해져 있었다. 같은 또래의 아버지 친구들이 정년 후, 막막해 할 때 아빠는 번듯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아빠의 전화벨은 다시금 울렸다. 아빠의 도움을 찾는 전화였다. 어떻게 하면 정년 후에 아빠와 같은 직장을 다닐 수 있는지 조언을 해주었다. 엄마는 다시 아빠의 도시락을 싸고 있다. 아빠가 교대근무하며 끼니를 거르지 않고 챙겨먹을 수 있도록, 집밥을 좋아하는 그가 집에 올 수 없지만 직장에서도 집 반찬을 먹고 힘낼 수 있도록 열심히도 싸고 있다. 나도 어느덧 아빠가 되어 나의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밉기만 했던 그때의 아빠를 떠올리며 이해할 수 없었던 아빠의 모습 속에서 그만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가정을 지켜냈던 걸 깨달아 가고 있다. 주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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