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 같이 모두 편집
은엽 아카시아. 넉줄고사리. 다 쓴 향수병 모으기. 자기 전에 라면 먹기. 에디 레드메인. 고양이 사진 찍기. 노란 전등. 폭신한 러그. 출근길에 건너는 돌다리.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 파란 하늘. 낯선 파란 하늘. 가을 하늘. 갑지가 찾아오는 가을 그리고 겨울. 나는 겨울이 싫다. 겨울은 모든 것이 죽는 것 같아서
"뭐야. 시간 된다면서."
"미안.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
현 오빠의 급한 일은 대게 이기적인 편이다. 물론 자기는 이기적이란 걸 절대 모르겠지만. 항상 약속에 늦고 항상 피곤하고 항상 미안해하고.
"아저씨! 그럼 밥은 언제 해줄 거야?"
"어. 다음 주 어때? 아니 내일 모래도 괜찮다. 언제든 와. 괜찮아. 진짜 이번만 봐주라."
오빠와 약속은 매번 어렵다. 언제나 된다고 하기에 더 어렵다. 언제나 된다는 건 또 언제나 약속이 파토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어찌어찌 약속을 잡아도 매번 늦었다. 다른 모임을 끝내고 오는 길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 모임에선 시간이 지나도 자리를 뜨지 못하고 어물쩡거리다 늦는 것이 태반이었다. 오빠는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지만 뻔하다. 매번 만나 같이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초초해하는 눈빛과 자주 쳐다보는 핸드폰. 나는 그것들이 신경쓰이지만 그냥 모른척 한다. 그래. 우린 아무런 사이도 아니니까.
"아. 몰라 졸러."
"몇 시에 일어났는데 벌써 졸려."
졸리다. 잠시 눕고 싶다.
"가현아. 다음에 진짜 맛있는 거 사줄게."
차라리 말이라도 말지. 마음 없이 하는 그런 말은 자기 마음에 짐을 남기기 싫어 던지는 그런 거겠지. 아 몰라. 졸려.
*
김 팀장은 이번 납품 영상 절반 정도를 날리라고 했다.
"아니. 이렇게 만들면 좀 곤란하지. 이건 니 개인 작품 활동이 아니잖아?"
억울하다. 나도 당신한테 그런 말 들으면서 일하는 건 좀 곤란하다. 처음 레퍼런스 보여줬을 땐 좋다고 해놓고선. 오늘 조금 지각했다고 이렇게 보복하는건가? 그렇다고 외주 작업물에 이렇게 분풀이하겠다고? 어이가 없지만 그대로 다시 자리에 앉아 노트북 검은 화면을 바라본다. 편집. 삭제. 삭제. 삭제. 영상을 기계적으로 들어내고 자르고 내 마음대로 다시 고친다. 아니 우리 클라이언트 마음에 맞춰 다시 자르고 붙인다. 수정. 수정. 수정.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 문득 벙찐 현 오빠 얼굴이 떠올랐다. 그 맹한 얼굴이 밤새 머릿 속에 떠올라서 잠을 잘 못잔 탓이다. 그래. 이건 다 오빠 탓이다. 만나면 따져야지. 내 마음 속 수첩에 할 말 하나를 더 추가한다.
퇴근길. 지하철을 타고 그냥 집으로 발길을 향했다. 지하철 안은 답답하다. 딱히 볼 바깥 풍경도 없다. 어두운 굴 속을 빠르게 지나간다. 어둠은 빠르게 지나간다. 예정대로면 현 오빠가 해주는 밥을 먹고 좀 쉴까 했는데. 갈 곳을 잃었단 생각에 우울해진다. 가을이 온다. 밤은 길어진다.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눈을 감으면 나는 어둡다. 가을이 오고 밤은 길어지고 나는 어둡다. 편집. 잠을 자면 그 순간들은 모두 편집된다. 집에 얼른 들어가 자고 싶다. 편집. 보기 싫은 것들은 모두 편집. 오늘 내 기분도 편집. 아니 그냥 삭제. 나도 이젠 어른이다. 나는 아무렇지 않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누나. 오랜만이야.”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들인다. 그리고 낮게 들리는 목소리.
익숙했지만 기억 저 너머에 잊고 있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뭐야. 진짜 자고 있던거야?”
낯익은 얼굴이 웃는다.
"누나 졸업하고 연락도 뜸하고. 나 은근 섭섭했었다고!"
"미안해. 정신이 없었어. 넌 잘 지내지? 연락처 그대로였던가?"
규빈은 재밌다는 듯 눈썹을 씰룩인다. 마치 귀가 축 늘어진 큰 골든 레트리버 같다.
"응? 나 핸드폰 번호 안 바뀌었는데?"
"아니. 꼭 그런 말은 아니고."
규빈은 좀 망설이는 표정을 짓더니
"누나. 밥 안 먹었으면 밥 같이 먹을래? 오랜만에 내가 밥 살게."
라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