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훈주 Oct 23. 2024

8. 단어의 파편

공심채 볶음은 베트남에서 배웠다. 현지 메뉴판엔 '모닝글로리'라 쓰여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한동안 공심채 볶음을 해 먹었다. 공심채를 보면 베트남이 떠오른다. 해외여행을 많이 가보지 못한 내게 베트남은 특별했다.




엄마는 나팔꽃을 키웠다. 내가 아직 어릴 때. 작은 아파트. 월셋집. 그 작은 집. 작은 베란다에 엄마는 나팔꽃을 키웠다. 엄마는 나팔꽃을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현아. 이리 와서 봐봐. 이게 나팔꽃이야. 실을 타고 계속 올라가는 거 보이지?"


엄마는 소녀였다. 지금 와 돌아보니 그때 엄마는 소녀였다. 꽃을 보며 엄마는 웃는다. 그땐 그걸 왜 몰랐을까.

시인 프로필 촬영을 했다. 그리 유명하진 않은 시인. 시집 구하는 건 어려웠다. 팔리지 않는 책은 빠르게 피고 진다. 그래도 촬영하는 사람 사는 예의인 같아 여기저기 책방에 전화를 했다. 인터넷 주문도 일주일이 걸린다고 했다. "잘 찾지 않는 책이여서요." 수소문 끝에 세종에 있는 한 대형서점에 딱 한 권 남아 있는 걸 확인했다. 주말 이른 아침에 친구에게 차를 빌려 탔다. 시인의 시집은 얇았다. 시는 짧았다. 다섯 줄 밖에 안 되는 시. 나는 그 시가 퍽 마음에 들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아침이 저물었습니다.'


시의 부제는 '나팔꽃에게'. 시인의 시를 보고 나팔꽃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나팔꽃은 영어로 모닝글로리. 공심채도 모닝글로리다. 나는 어릴 때 나팔꽃을 키우는 엄마가 있었고, 26살에 공심채 볶음을 해 먹었고, 29살에 시인의 글을 읽으며 이제야 그 셋이 모두 같은 거란걸 알게 되었다. 


그토록 모든 단어는 파편적이다. 그 단어를 맞춰가는 순간들일 내겐 삶이었다.


시를 읽으며 잔잔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글을 잘 알진 못하지만 글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이렇게 사진 찍는 건 처음이네요." 시인은 웃었다. 인스타에 프로필 사진 촬영을 무료로 하겠다는 이벤트 글을 올렸는데 디엠이 왔다. "나이가 좀 있는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사진과 나이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만 어떤 마음일지 느껴지기도 해서 서러웠다. 베트남은 가족과 처음 갔던 해외여행이었다. 그런 여행을 또 갈 수 있을까. 늙어 가는 엄마를 보며 가끔 나팔꽃을 키우던 엄마가 겹쳐 보였다. 시인 촬영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흘 동안 시집을 구하고 읽고 난리 친 것에 비해 사진 찍는 건 순간이다. 



가현이는 집에 와 있었다.


"언제 왔어?'

"별로 안 됐어. 한 이십 분 전?"

"배고프지?"

"아냐. 괜찮아."


가현이는 티브이에 시선을 떼지 않는다. 나는 그게 일종의 항의란 걸 알고 있다. 저번에 갑자기 약속 취소한 것에 대한.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어떤 사과도 하지 않는다. 가현이도 내가 사과하지 않을 거란 걸 알고 있을 거다. 서로에 대해 서로 너무 잘 알아 서로 확인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게 가현과 나 사이 작은 틈이다.


"너 그렇게 사람 붙잡아 두고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그게 제일 나쁜 거야."


민수형은 매번 가현이 이야기를 들으면 뭐라고 했다. '그게 제일 나쁜 거야.'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바라볼 뿐이다. 가현이와 나 사이에 벌어진 작은 틈.


"오늘 마침 공심채 사 왔는데 잘 됐다. 너, 예전에 이거 좋아했잖아."

"몰라. 기억 안 나."

"먹어 보면 기억날걸?"


공심채를 씻고, 상한 줄기는 떼어낸다. 편 마늘을 썰어 기름에 볶는다. 취향에 따라 페페론치노를 하나 썰어 넣는다. 공심채도 기름에 넣고 볶다가 마지막에 굴소스로 간을 한다. 밥솥에서 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냉장고에서 어제 만든 베이컨 미소 된장국도 꺼내 데운다. 간단히 저녁을 차린다. 그러면 가현이는 아무 말 없이 식탁에 앉는다. 밥을 먹는다.


"요즘 일은 어때? 김 팀장이 아직도 괴롭혀?"

"아니. 뭐 괜찮아졌어. 가끔 부리는 히스테리지 뭐."

"다행이네. 너 한동안 그래도 김 팀장 때문에 힘들어했었잖아."

"그렇긴 했어. 그래도 형처럼 맨날 일거리 없어 시달리는 건 아니니까."

"그러게 쉽지 않다. 가끔 니가 부럽다니까."


가현이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자기 힘든 이야기를 잘 터놓는 성격이 아니니까.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기억한다는 건 일종의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일부러 가현이가 예전에 말했던 이야기를 되물어본다. 그게 가현이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위로다. 너의 기억이 머물 수 있는 곳이 이곳에 있다고 나는 말하고 있는 거다.

계속 가현이가 가끔 이렇게 찾아와 쉬었다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니까. 아무래도 나는 가현이와 나 사이에 깨져버린 파편들을 찾아 맞출 자신이 없다. 그러니 가장 잘 아는 동생이지만 또 평생 알 수 없는 동생이 될 것만 같다.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딱 여기까지가. 너를 보고, 너에게 밥을 지어주고, 너를 보내는 이 일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다.




"형.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잖아."

"응?"


민수형이 나를 쳐다본다.


"그래도 나 나쁘게 살지 않으려고 노력하잖아. 가현이한테 상처 더 이상 안 주려고. 그래도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어서 나도 노력하는 거잖아. 그러면 나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거잖아."

"그래. 그건 알지. 하지만 이 상황이 계속된다면 서로가 점점 힘들 거란 건 알지?"

"그건 알지. 알지만... 하지만...."

"파도에 바위가 부서져도 모래가 남아. 언젠가 모든 건 처음 것을 잃어버리지만 뭔가 남아. 난 너희 사이에 좋은 기억이 남길 바랄 뿐이야."

나는 그 말에 잠시 멍 해 있었다.



'아침이 저물었습니다'

위 시는 김채운 시인의 <너머>라는 시집 중 <늦은 인사>라는 시의 첫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이전 07화 7. 가끔 내 기분을 정당화하고 싶은 마음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