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가 울었다. 울지 않았지만 나는 울었다 믿었다.
민수 형이 울었다. 오래도록 연락도 잘 되지 않던 형이었다. 그래도 꽤 다정했던 선배. 과 선배였고 첫 과 M.T. 때 팔자에도 없던 술을 마셨다. 정신을 잃었을 때 자기 자취방으로 업고 간 선배다. 그런 선배가 울었다. 갑자기 연락이 왔고 조만간 보자고 했다. 흐느끼며 운 것은 아니지만, 울음소리가 있지도 않았지만, 나는 왠지 핸드폰 너머 선배는 울었다 믿었다.
이렇게 다시 연락한 게 5년 만인가. 정말 오랜만에 듣는 선배 목소리지만 어제 만난 사람처럼 낯설지만은 않았다. 때론 추억은 시간보다 앞서 기다리곤 한다.
손이 남자치곤 유난히 가늘고 긴 형이었다. 그런 사람이 얇은 담배를 피우면 그 모습은 납득이 되곤 했다. 나는 얇은 담배만 펴. 그래. 저런 사람이면 담배를 펴도 되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진 모른다. 대학 초반은 다 그랬다. 성급하게 감상적이었고, 미련하게 망설이는 일이 많았다. 민수 선배가 담배 피는 모습이 멋져 보인 건 성급한 감상이었고, 그 형이 해 준 조언을 듣고도 시도하지 못한 것들은 망설이는 일들이었다.
5년 만에 듣는 그런 선배 목소리가 울음이라니. 한 번은 뉴스에서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인터뷰를 본 적 있다.
“저도 참 난감하네요.”
20년 전 학생들과 초등학교 운동장 구석에 묻은 타임캡슐을 개봉식 취재 현장이었다. 흙을 파내고 타임캡슐을 꺼냈지만 그 사이 빈틈으로 물이 들어가 대부분 물건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던 해프닝이다. 공책은 알아볼 수 없게 뭉개졌고, 누군가의 인형은 삮았으며, 추억을 기억하고자 넣은 사진들은 다 물어 젖어 형체를 볼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설명해야 할지…”
그 당혹스러운 교장 선생님 표정이 잊히지 않았다. 조금 시간이 지난 뉴스다. 선배 목소리를 들으며 그 교장 선생님 마음을 알 거 같았다
“가을이 오는 것 같네.”
민수 형과의 약속은 생각보다 빠르게 잡혔다. 야. 오늘 시간 되냐. 불쑥 나타난 선배 질문에 어물쩍 거리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민수 형은 많이 피곤해 보였다. 꽃은 시들고 날은 저문다. 나는 애틋함을 바라보길 좋아했다. 벚꽃 잎이 떨어지는 것이 좋았고,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좋아한다. 가현은 여름 꽃을 좋아했다. 내게 꽃길만 걸었으면 좋겠다 했지만 내가 꽃길을 걷기 위해선 누군가는 시들어야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민수 형과는 대학생 때 자주 갔던 맥주집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찾은 대학 거리는 예전의 생기를 잃을 듯했다. 아니면 더 이상 골목 사이에 숨겨져 있던 여러 기회와 추억들이 생각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넌 아직도 가현이랑 만나고 있냐?”
“만난다기 보단 그냥 알고 지내고 있죠.”
“개도 참 변함없네.”
“그쵸. 쉽게 변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너도 그래. 알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맥주집은 적당히 시끄러웠다. 젊은 애들은 분위기에 취해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쉽게 흥분하고, 쉽게 기대하게 되는 것이 어린애의 일이라면 나이 먹는다는 것은 모든 것에 천천히 반응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떨어지는 꽃잎에도, 낙엽에도 더 이상 마음을 흔들리지 않겠다 매 해 다짐을 하며 살아간다. 변하지 않는 사람. 정말 그런 게 있을까.
“선배. 변하지 않는 건 좋은 건가요?”
“내겐 그래.”
민수 형은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유학에서 왜 돌아왔는지, 유학 생활은 어땠는지, 이제 뭘 할 건지 궁금했지만 쉽게 물어볼 수 없을 거 같아 먼저 이야기해 주길 기다렸다. 옆 테이블이 왁자지껄할수록 우리 테이블이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들이 생기를 갖추고 피어가는 동안 우리는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라가고 있구나. 술을 마신다. 쓰다. 팔자에도 없는 술. 하지만 오늘은 술을 마시고 싶다.
나이가 들어서도 대학가를 맴도는 선배들이 있었다. 졸업을 하고서도 자주 과 방에 나타나는 선배들이 있었다. 그들은 맴돌고 있는 거였다. 준비. 땅! 레이스가 시작되었지만, 저는 아직 달릴 준비가 되지 않았는걸요? 과 방을 드나드는 졸업 선배가 말한다. 그러면 언제 출발하실 건가요? 경기 심판이 묻는다. 꼭 출발해야 하나요? 선배가 말한다. 네. 뒤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 심판에 말에 선배는 뒤를 계속 돌아보며 어기적 뛰어간다. 그런 모습을 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이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민수 형이 말한 본심은 딱 하나였다. 어디로 갈지 모르겠다는 말. 해가 지지 않는 걸 봤어. 온 세상이 밝아. 나는 그곳에 결국 간 거야. 그런데 그곳에 가서도 내가 뭘 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는 거야. 집에서 최대한 멀리 도망갔는데 다시 도망가야 할 것만 같아. 그 말에 나는 그저 듣고만 있었다. 가현이 나는 공감은 잘 하지만 위로는 못하는 스타일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가현이랑은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어요. 그냥 시간이 흘러가게 두는 거죠.”
“그건 서로에게 나쁜 거야.”
민수 형은 가고 싶은 곳이 있었지만 나와 가현은 가면 안 될 곳이 있었다. 어릴 때 보도블록을 걸으면서 빨간 벽돌은 밟지 않는 것처럼 가면 안 될 것 같은 선이 있었다. 그 선을 바라보며 가현과 나는 서로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더 말라기는 듯했다. 가현은 예뻤다. 누군가가 시들어야 한다면 그게 내가 되어도 괜찮겠단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나와줘서 고마워.”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민수 형에게 전화가 왔다.
“멀리서 돌아왔는데 당연히 나와야죠. “
민수형의 전화를 받고 가현이 떠올랐다. 누구든 어서 마음의 결정을 해야 할 거야. 민수형이 그리 말한 지도 어느덧 5년이 흘렀다. 민수형과 이야기하면 나는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느낌이다. 무겁게 축 가라앉는다. 그게 과거에 멋져 보였던 선배를 다시 만났기 때문인지 가현에 대한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어 헷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