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훈주 Nov 01. 2024

11. 어제 내 마음은 고이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규빈.

변하지 않는 게 있을까?

어제 좋아했던 마음도 자고 일어나면 정말일까? 싶을 때가 있다.

내가 너를 좋아했던가.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모든 것이 거짓말 같아 싫어진다.




아빠는 산신령이 있다고 믿는다.


“함부로 쓰레기를 산에 버리면 안 돼. “


아빠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밥 먹을 때 말하지 말라 했던 사람이니까. 아빠라곤 하지만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대화하는 시간은 적었다. 나는 사춘기 때 스스로 면도를 배웠다.


“정말이야. 산신령은 있다고.”


아빠는 산에 있는 쓰레기를 주우며 내려왔다. 아빠는 변하지 않고, 어린 마음 하나를 지키고 살아왔구나 싶었다. 나는 그런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사람.


가현 선배를 만났다. 변하지 않는 사람. 얼굴에 마음이 다 드러나는 사람. 불안함이 많았던 사람. 그래서 작은 것에도 쉽게 즐거워하고 또 쉽게 질리던 사람.

동아리에서 만났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어느 순간 발길이 뜸해지고 연락이 뜸해진 선배. 대학 동아리란 게 그렇지. 반짝이는 순간이 있고 알아서 물러나야 하는 순간이 온다. 대부분 동아리 커플들이 그랬다. 한때 불타듯 뛰 돌다 함께 사라졌다. 거기에 사람이 있었나요? 사람을 붙잡으려면 썰물처럼 함께 흐름을 타고 밀려나가야 했다.


“썰물은 달의 일이야. 규현아.”


언제 한번 가현 선배에게 물었다. 선배. 요즘은 동아리방에 잘 안 오시네요.


“그래도 간간히 우린 볼 테니까.”


‘우린 간간히 볼 테니까’. 그 말 한마디가 나를 붙잡았다. 가능성이었다. 그 언제가 언제인지는 말해주지 않았지만 꼭 조만간 올 것만 같았다.

기다리는 것은 내겐 어렵지 않았다. 썰물이 달의 일이라면 나는 달이 되어 항상 같은 얼굴로 적당한 거리를 맴돌았다.

이게 사랑인 걸까? 했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가현 선배 옆에 사랑이란 단어를 붙여도 되는 걸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우연히 다시 다이어리를 펼쳐 본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넌 어떤데.”

“잘 모르겠어요. 나는 변하지 않는 사람인데. 결국 나도 변하는 사람인 걸까. 그런 생각이요.”


쓰러져 가는 헌책방에 허리가 쓰러져 가는 책방 할아버지와 함께 앉았다. 집 근처에 있는 헌책방에 출근 중이다. 딱히 사람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일 하자고 제안한 것도 아니지만 그냥 옆에 있는다. 할아버지는 알아서 점심때 밥 한 끼를 더 준비한다.

할아버지는 오래된 사랑 이야기에 눈썹을 움직였다. ‘너는 아주 고약한 연애를 해야 해’. 할아버지 주장이었다. 세월에 무너지는 얼굴 속에도 그 사람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책방 할아버지의 오뚝한 콧대를 보면 예전에 참 많은 여자를 울렸겠구나 싶다. 귀가 어두운 할아버지지만 연애 이야기엔 귀가 열렸다. 하여간 선택적으로 안 듣는 척하는 것 같다니까.


할아버지는 오랜 시간 낡은 헌책방을 붙잡고 살았다. 예전엔 깔끔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며 책을 더 이상 놓을 공간이 없자 보도블록까지 책이 삐져나왔다. 이제는 마치 책방 어딘가 책이 계속 쏟아져 나오는 책장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노인과 바다>. 바다로 나가고 다시 돌아온다. 별로 남은 것은 없지만 계속 움직이기에 그렇게라도 살아간다. 그것이 노인이 할 수 있는 전부다. 노 젓기.


“내가 어릴 적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었어. 그런데 동생들이 있었거든. 그래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컬러 잡지를 주워다 팔았지.”


한 번은 할아버지가 헌책방을 운영하는 이유를 물은 적이 있었다. 살려고. 살아야 했기에 책을 주워다 팔았다. 국어선생님이 되고 싶다던 할아버지는 지금도 꾸벅꾸벅 졸면서 책장을 넘긴다. 책방에 쌓인 책들이 할아버지 허리를 짓누르듯 할아버지 허리는 굽었다.


“변한 건 없어. 책은 그대로 그렇게 쌓이는 거야.”


할아버지는 사랑 이야기로 시작했다가 책 이야기로 끝났다. 대개 그랬다. 할아버지 정신이 말짱한 날이 점점 더 줄어갔다. 할아버지의 어제와 오늘의 할아버지가 낯설게 보이기도 했다.


가현 선배에게 몇 번 문자를 하다 마음을 접었다. 썰물은 달의 일이야. 가현 선배는 알 수 없는 말을 하곤 했다. 더 만나서 잘 지냈냐고, 요즘 하는 일은 힘들진 않냐고, 그때 식사 후 더 보고 싶진 않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 모든 말들은 고이 접어 달 위로 띄워 보냈다. 보고 싶었다고. 그 말 한마디를 하고 싶어 밥을 같이 먹자 했지만 수저를 내려놓고, 버스를 태워 보내면서도 나는 그 말 한마디를 하지 못했다. 문자를 하고 더 이야기를 이어가도 그 말은 하지 못할 거 같았다.




나는 사랑이었다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가현 선배에게 문자가 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