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황훈주 Nov 08. 2024

12. 너와의 관계에 이별이랄 건 없어서

가현. 특별한 너와 헤어짐에 특별한 단어를 붙일 수 없었다.

“이번엔 내가 갈게.”


언젠간. 규현이를 만나러 가야겠단 생각은 지렁이처럼 머릿속을 꾸물거렸다.




 “땅을 두드리면 지렁이가 올라와. 왜냐면 땅이 울리면 지렁이는 비가 오는 줄 알거든. 그렇게 나온 지렁이는 메마른 땅에서 꾸물거리다가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간다고.”


현 오빠는 어쩌다 이런 말을 했더라. 아마 밥을 먹으면서 했을 거다. 시답지 않은 말 대부분은 밥 먹을 때 했다. 그게 그의 관심 표현이었겠다만. 결국 그는 자기 방식대로만 말하겠다 싶었다. 그게 싫기도 했지만 우습게도 나중 머릿속에 맴도는 말들이었다. 아무렇게나 툭 던진 말일 텐데 나는 그 말들을 주워 담아 어딘가에 꼬깃하게 보관하는 거였다. 아무런 것도 아닐 텐데. 가끔은 지렁이가 마른땅 위에 올라와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곤 다시 들어가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가끔은 규현 생각이 나곤 했다.


“나중엔 내가 밥 살게.”


그 말 한마디에 규현이는 며칠이고 나를 기다릴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말? 그럼 나야 너무 좋지”


톡으로 오가는 대화 속에서도 규현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사람이라. 그게 좋았고 또 그래서 슬퍼진다.


“너는 글 보면 딱 너 글인 거 티 나는 거 알아?”

“그래?”

“어. 그래서 조금 소름 돋아.”

“그래서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그때 그냥 웃으면서 대답을 미뤘다. 규현의 글을 보면 얼굴이 떠올랐다. 웃는지, 우는지. 그게 한 때는 좋았고 또 그 익숙해짐이 싫었다. 선배. 저는 선배가 제 글 읽어주면 좋아요. 규현은 가끔씩 자신이 쓴 습작들을 pdf로 묶어 보내곤 했다. 한땐 열심히 읽어줬지만 어느 순간부터 카톡 어딘가에 쌓아 두고 상투적인 말을 건네곤 했다. 고마워. 잘 읽어볼게. 규현의 pdf. 그 습작들은 지렁이다. 꾸물꾸물 거리면서 갈 곳을 찾고 있지만 대부분 내 카톡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죽는다. 비가 온다 생각하고 신나게 나온 지렁이는 햇빛에 타들어 죽는다. 너무 착한 사람이라 내가 나쁜 사람이 된다.


예전 규현 집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 기억을 더듬어 갔다. 오르막길에 ‘축 개발’이란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동네 반 쪽은 이미 평평하게 건물들이 밀린 후였다. 이렇게 좁은 땅이었나. 평평하게 밀린 땅은 생각보다 좁았다. 구불대고 오르내리던 길과 오밀조밀한 집들이 있던 곳이었다. 고작 저 정도 작은 땅에 붙어 아웅 댔구나 싶었다.


“대나무숲도 밀렸더라.”

“응. 재개발한다고 했는데 정말 다 밀어버리더라고. 아쉽긴 했는데 어쩔 수 없구나 싶어. “


규현 동네엔 대나무숲이 있었다. 폐가였다. 한때는 잘 나가던 부호의 집이라고도 했고, 연예인이 불륜녀와 함께 지냈던 아지트 같은 곳이라고도 했다. 집 담을 둘러 대나무를 심었는데 사람이 떠나고 관리하는 이 가 없자 담장 너머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섰다. 우리는 그걸 대나무숲이라 불렀다. 대학교를 다니며 힘든 일이 있을 때 가끔 규현과 통화를 했다. 그렇게 남들은 모르는 고민들을 서로 나눴다. 규현은 내 마음을 걱정해 주는 후배였다. 선배. 오늘 왜 울었어요?


“저렇게 사라진 걸 보면 막 무력해지기도 하는데 웃긴 거 같아. 사실 나랑 저 대나무숲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


규현이 웃었다. 대나무숲에 우리의 추억을 묻었다 해도 결국 우리 건 아니었다. 규현은 대나무숲이 밀리는 것을 목도했을지도 모른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순간 규현은 울었을까.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까 이상하다 그렇지?”


규현은 대나무숲을 좋아했다. 규현 집을 오가는 날엔 나도 대나무숲을 생각했다. 여름에 산책하면 좋아요. 담을 빙 돌아가는 거죠. 스산하기도 하고 댓잎 소리도 좋거든요. 규현은 여름에 또 오라고 했었고, 그때는 두꺼운 코트를 입은 겨울이었다. 다음에 또 오겠다 했었는데 한참이 지나 이렇게 다시 왔고 여름 대나무숲은 결국 보지 못했다.


규현이 웃는다. 규현은 자주 웃었다. 눈은 웃지 않았지만. 남이 불편해 보일 때 괜히 먼저 웃었다.


“뭐가 이상해. 조금 낯설긴 하다. 이렇게 다 밀린 줄 몰랐지.”

“말해줄걸. 미안해.”

“미안할 건 없지 뭘.”

“그럼 우리 뭐 먹을까? 뭐 사 주실 건가요. 선배님!”


그냥 밥 한 번 사는 건데, 커피 한 잔 사는 건데 규현을 만나러 오는 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웃는 규현을 보면 그렇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규현의 마음이 짐작되니까.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나왔다. 그렇지만 또 우리 사이에 이별이랄 것도 없어서 목에 힘을 주다가도 혼자 민망해지는 거였다.




오래전 걸었던 길은 사라졌고, 대나무숲도 사라졌다.

규현과 함께 했던 잠시 시간은 묻어두었다 싶었는데

지렁이는 자꾸 불쑥 솟아올랐다.

야. 아직 비는 오지 않았어. 어서 들어가.

나도 딱히 비를 생각하고 오진 않았어.

지렁이는 꿈틀꿈틀 거린다. 우리 사이는 뭐였어? 규현이 물었던 날이 있었다. 지렁이를 밟는다. 꿈틀거린다. 우린 뭐였어?

그런 생각 속 나는 비겁해지고 나쁜 년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