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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황훈주 Nov 22. 2024

14.  내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바라던 인연이었다

가현. 그걸 그때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나는 이따금씩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20대가 되던 날, 늙는 것이 두려웠다.

남들은 다들 이제 내 인생이 시작되었다며 즐거워하고 있는데

나는 어쩐지 이 모든 게 끝나버릴 것만 같았다.



얼굴을 찌푸리는 건 습관이었다. 웃을 때 묘하게 왼쪽 입꼬리가 처지는 것 같았는데 나는 필시 얼굴 근육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믿었다.

인터넷에서 언뜻 본 페이스 요가는 내가 이해하기론 얼굴을 최대한 찡그려 망가트리는 거였고, 그때부터 생각날 때마다 혼자 얼굴을 찌푸리곤 했다.


나는 분명 대학 생활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다.

다들 부러워하는 청춘이었지만, 우린 청춘이 뭔지 몰랐고, 그럼에도 속절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무서워 악을 쓰는 듯했다.

애써 증명하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았다. 나는 보통 애쓰기보단 피하는 편이었다.


그날도 공용 프린터 앞에 줄을 서고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당시 대학 교양관에 큐브란 복사기가 여럿 있었다. 그럼에도 대부분 1층 복사기를 선호했는데

다들 강의 시간이 다 되어서 강의 자료 복사하기 바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랬다.

이미 내 앞에 세 명 정도 대기하는 인원이 있었다.


언뜻 보니 내 앞사람도 같은 강의를 듣는 듯했다.

내가 뽑을 강의 자료를 다운로드하고 있었다.

어깨를 툭툭 쳤다.


“저기. 혹시 지금 뽑으시는 거 한 개 더 프린트해 줄 수 있어요?”

“네?”


앞에 있던 남자는 당황한 듯 보였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곤 내가 한 말 뜻을 이해하려 얼어붙은 듯했다.


“저도 지금 뽑으시는 거 필요하거든요. 같은 교양 수업이에요.”

“아아. 그렇군요.”

“걱정 마요. 인쇄비는 드릴 테니까.”

“아니에요. 그냥 뽑아드릴게요.”


남자는 흔쾌히 프린트물 하나를 더 뽑아줬다. 꽤 두툼했는데 그냥 준다니 이득이었다.


“그런데 재미없는 강의 들으시네요.”


남자가 말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잖아요.”


흔한 인사치레였다.


“왠지 재밌는 것만 찾아 들으실 줄 알았어요.”


그 말에 빤히 얼굴을 쳐다봤다.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정확히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매번 그런 건 아니라구요. 그래도 들어야 할 건 들어야죠.”

“교양인데 필수 과목이에요?”

“우리 과가 좀 특이하잖아요.”

“과가 어딘데요?”


남자는 일단 나와 같은 과는 아닌 듯했다. 한시름 놨다. 과 생활만큼은 무리 없이 지나가길 바랐으니까.


“영문과요. 매번은 아니고 가끔 필요 수업 있을 땐 들어오라 하시거든요..”

“멋지네요. 영어 잘하시겠네요.”


뻔한 질문이었다. 대화 흥미가 점점 떨어졌다.


“별로 그렇지도 않아요. 배우는 건 셰익스피어 같은 옛날 영어라.”

“아아.”

“그럼 이제 곧 수업 시작이니까 들어가시죠.”


이대로 함께 강의실에 들어가면 같이 앉게 될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누면서 누군지 기억해보려 해도 그게 잘 안됐다.

저 서글서글한 눈웃음만 기억이 났다.

화장실에 간다 하고 먼저 남자를 강의실에 들여보냈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고 강의실에 들어갈 생각이었다.


혹여나 내 찡그린 얼굴을 보진 않았을까 잠깐 고민했지만

어차피 또다시 만날지도 모를 인연이었다.

별생각 없이 화장실에서 나왔는데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만큼은 얼굴을 찌푸리지 말아야겠다 생각했지만 그럼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막막했다.



따분했던 것은 어쩌면

내게 쉽사리 오지 않을 즐거움을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 대학은 그랬다. 미리 기대하고 실망하기보단 먼저 포기하는 편이었다.

그토록 나는 어쩜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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