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현. 수상한 동아리에 들어갔다.
계단이 하나 더 있는 줄 알았는데 없을 때.
덜컹.
놀란 내 마음.
가현 선배를 다시 만난 건 교양 과목 수업이었다.
선배는 매번은 아니고 교수님이 들으라고 하는 수업 날만 나온다 했다.
그리스로마 수업이었다. 에로스와 프시케의 이야기였다.
프시케는 신탁에 따라 괴물과 결혼하게 된다.
괴물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그는 밤마다 찾아와 해가 뜨기 전에 떠났다.
괴물이라 했지만 그의 목소리와 태도에 호기심이 생겼고,
프시케는 괴물에게 얼굴을 보여달라 했다.
괴물은 어둠이었다. 암흑 속에, 아무 빛 없이 프시케에게 다가왔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다.
프시케는 그의 얼굴을 궁금해했고, 혹여나 나중 자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불과 칼을 준비해 괴물 얼굴에 빛을 비췄다.
그렇게 드러난 괴물의 정체는 에로스였고 자신을 의심한 프시케를 에로스는 떠났다.
그때 등불의 뜨거운 기름이 에로스 어깨에 떨어졌다.
"별 재미없는 이야기인데요."
"원래 교수님들은 재미없는 것만 골라서 과제를 내요."
몇 마디를 주고받으며 수업을 같이 들었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린 것에 가현 선배는 놀라는 눈치였다.
아니,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눈치다. 나 혼자 좋아한 일이니
실망할 것도 없었다. 대화를 나누며 조금은 나를 알아보지 않을까 했지만
뜬구름 잡는 듯한 이야기만 몇 번 더 오갔을 뿐이다.
"프린트 고마워요."
수업이 끝나자 가현 선배는 먼저 일어났다. 뭐라 인사할 것도 없이 급히 떠났다.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 뒤를 따랐다. 궁금했다. 수업 후엔 뭘 할까. 누구를 만날까.
언제 또 만날 지 몰랐다. 지금 와서 카톡으로 연락한다 해서 나를 기억할 것 같지도 않았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2학기 교양 수업 같이 듣기로 했던 사람입니다.'
구차한 인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호기심이었다. 대학 생활에 대한 로망을 하나씩 품는다면 나는 운명을 꿈꿨다.
최대한 선배가 다니는 길목에서 우연히 마주칠 계획이었다.
안녕하세요. 또 만났네요. 이거 참 우연이네요. 마침 제가 1+1으로 초코에몽 하나 있는데 드실래요?
왜 하필 가현 선배였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따로 없었다.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그저 프시케 신탁 같은 거다.
가현 선배는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향하는 방향은 연합 동아리 건물이었다.
입학식날, 대학 정문부터 왁자지껄했던 동아리 홍보도 이제 시들해질 무렵이었다.
딱히 동아리에 들어갈 생각이 없던 나로서 동아리 건물은 처음 마주했다. 생각보다 큰 건물에 놀랐다.
선배가 들어간 동아리는 3층 맨 끝 방이었다. 동아리 이름은 '전국 칵테일 동아리 연합회'.
대학생 동아리치곤 꽤 거창하잖아? 싶었다. 동아리 문 앞엔 입학식 동안 나눠줬을 법한 동아리 홍보 전단지가 있었다.
전국 칵테일 동아리 연합회!
세상에 숨겨진 불법 양주를 모아 두고 있습니다.
'캡틴큐', ' 전기부랑', '글랜피틱 18년 산' 등 세상에서 사라졌다 생각한 진귀한 양주를 만나보세요.
세계적 바텐더 'JK'가 만든 전국 칵테일 동아리 연합회 본부.
당신의 대학의 청춘은 양주에 빠져 휩쓸려도 좋으니 너는 우리에게 헤엄쳐 오라!
동아리 홍보치고 거창하다 싶었다.
"뭔가. 자네. 자네도 우리 동아리에 관심 있나?"
"네?"
뒤를 돌아보니 빼빼 마른 사내 한 명이 동그란 안경을 고쳐 쓰며 나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입단 테스트는 내일이다! 저녁 7시까지 이곳으로 오라고."
사내는 할 말을 마쳤다는 듯 동아리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 틈 사이로 잠시 가현 선배가 보였다.
저녁 7시. 나는 계획에 없던 일정 하나를 추가했다. 무슨 입단 테스트가 있는지도 모른 체.
지금 와 생각해 봐도 세계적 바텐더 'JK'가 누구냐고 물어보면
나는 모른다. 한 번쯤은 물어볼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