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투를 벗다
이삿짐은 할머니의 친척분, 내게 먼 친척의 업체에서 하기로 했다. 조율은 할머니가 해주셨다. 이사 당일 친척 부부와 함께 짐을 옮겼다. 이사 비용을 현금으로 준비하려고 했는데 은행에 가지 못해 계좌 이체하기로 마음먹었다. 1층에서 3층으로 왔다 갔다 하며 짐을 옮기며 타이밍을 쟀다. 친척의 부인 분과 엘리베이터에 단둘이 서 있을 때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제가 현금을 준비 못 해서... 계좌 번호 알려주시면 바로 입금할게요.”
“그거, 할머니가 줬어요.”
“아... 할머니가요...”
고마운 생각보다는 당혹스러웠다. 부끄러웠다. 집 계약의 과정, 대출 등은 언니에게 빌붙다 못해 이제는 이사 비용마저 할머니의 도움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명절 목전에 하는 이사는 장을 보러 다니는 할머니를 배로 버겁게 했다. 할머니는 명절 때마다 며칠 내리 밤을 지새우셨는데 거드는 사람이 우리 세 자매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할머니는 피곤한 걸 이 악물고 버텼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장 보러 가는 길에 왔다며 손수레를 끌고 이삿집에 오셨다.
짐을 모두 옮긴 후 할머니와 단둘이 있게 되었을 때였다.
"이사 비용 냈다며. 돌려줄게."
"할머니가 이거라도 해주는 거야. 냅둬."
원래라면 만류에도 어떻게든 주머니에 돈을 찡겨 넣었을 텐데 이번에는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갑이 점점 얇아지다 못해 지갑마저 팔아야 할 신세가 된 나는 언젠간 갚겠다고 속으로 외치며 수긍했다.
박스를 모두 뜯어서 짐을 풀었다. 느긋하게 할 수 없었다. 정리가 완전히 끝나야 본가에 있는 후쿠를 부를 수 있었다. 시장에 간다고 말하면서도 할머니는 살림살이를 정리해주셨고 나는 그 옆에서 부랴부랴 캣타워 상자를 뜯었다. 분명히 설명서를 챙겼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인터넷에 접속해서 설명서 검색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결국 나는 기억에 의지해서 나사를 조였다가 풀었다가 1시간 가까이 캣타워와 씨름했다.
내가 후쿠 살림에 집중할 동안 할머니는 내 살림을 챙겼다. 정리가 끝났다고 하자 언니가 후쿠를 데리고 왔다. 하루라는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더 아득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끝났다는 안도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어쨌거나 굴러갔다.
다음 날, 새로 산 방묘문과 공유기가 도착했다. 후쿠는 낯선 물건에 겁을 먹고 후다닥 난방 텐트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둘이서 낑낑대며 설치하는데 설명서를 붙잡고 있는 내가 정작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다. 참다못한 언니는 내게 말했다.
“가서 공유기 설치해. 나 혼자 할게.”
아무 말 없이 방묘문을 언니에게 맡기고 공유기를 설치했다. 와이파이가 잡히자 홈 CCTV, 자동급식기를 연결했다. 홈 CCTV를 어디에 둘 것인지로 고심을 하는데 방묘문을 설치한 언니가 나머지를 도와줬다. 거침없이 일을 처리하는 언니를 보면서 그동안 쌓여왔던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입밖에 나왔다.
“나 생각보다 바보인 것 같아.”
“왜?”
“아무것도 못하잖아. 혼자서.”
정말 그랬다. 집을 찾는 것부터 작은 일까지, 서른이 넘었는데 언니와 할머니가 하나하나 떠먹여 줬다. 가족들이 의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가족들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무슨 근거로 나를 야무지다고 생각한 거지?'
그동안 야무지고 똘똘하다 여긴 나는 정말 내가 아니라 사회에서 만들어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는 것을.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회사원은 회사일을 열심히 한다. 그걸 무탈히 수행했다는 하나만으로 나를 과대평가했던 것이다. 외적인 가치를 외투 삼아 입고 거드름을 피웠다.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벗어났을 때 비로소 내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나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싶어.”
사실을 인정하는 건 슬프지 않다. 오히려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알량한 자신감이 조금 수치스러울 뿐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어떤 모양인지 생각하지 않고 외부에서 주어지는 모양에 얽매어 나를 재단했다. 그래서 지금은 내 원래 모습이 어떤지 모르겠다. 성에 낀 유리 너머를 보는 기분이다.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되찾고 싶어.”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나서야 텅 빈 걸 발견했다. 정말 다행히도 난 한 달 정도를 더 쉴 수 있다. 만약 지금 상태로 다시 사회에 나간다면 그 구멍을 외부의 가치와 시선으로 기울 게 틀림없었다. 아무것도 없는 걸 오롯이 느끼며, 그것이 내 본질이라는 걸 체감하고 싶다. 그리고 내 마음 어딘가에 숨어버린 진짜 나를 다시 찾고 싶다.
이사를 감행한 주인공이지만 이사에 전혀 관심이 없던 후쿠 덕분에 집사는 자신이 공허함의 근원에 살짝 닿았다. 이제는 새 보금자리에 온기를 채워가듯 내 마음을 채워가고 싶다.
그렇게 이사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