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일만 생각해.
고양이 이름은 후쿠. 성은 강 씨다. 자녀는 보통 부모 성씨를 따라간다. 하지만 난 내 성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물림된 가정폭력, 무책임, 욕설 등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다. 그래서 그 피를 물려받았은 것도, 그 성씨도 싫다. 그럼 엄마의 성씨? 우리를 버린 것도 모자라 재혼하고 이후 스스로 생을 마감한 불쌍하고 무책임하며 여린 사람의 성씨는 더더욱 싫다.
강한 부드러움, 책임감이 넘치고 의지로 모든 역경을 이겨낸 사람. 생각 하나하나가 멋진 우리 할머니의 성씨를 따왔다. 그래서 후쿠는 강 씨다.
“강후쿠!”
후쿠가 모래를 마구잡이로 튀길 때나 간식을 주려고 부를 때 성을 붙여 후쿠를 부른다. 옆에 있던 언니는 코웃음 친다.
"성을 붙여 말하는 게 너무 웃겨."
우리 할머니는 여느 할머니처럼 우리가 얼른 결혼하고 아이를 낳길 바라지만 셋 다 결혼도 기약도, 가능성도 없다. 없었다! 이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분명! 그런데 사람 일은 모른다는 말이 정말 맞다. 이번 설이 지나고 언니가 유부녀가 될 조짐이 나타났다.
아무튼 후쿠를 할머니한테 처음 소개할 때 난 할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얜 할머니의 증손묘야. 사람은 아니어도 증손주처럼 여겨줘. 난 결혼 안 할 거니까."
할머니는 후쿠를 한 번 쓰다듬고는 너무 마른 것 같다는 한 마디 말고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은연중에 다른 집이나 공장에 보내면 잘 키운다며 회유하려고 들었다. 후쿠가 떠나고 마음고생할 내가 벌써부터 눈에 그려졌나 보다. 그러나 할머니도 점점 후쿠에게 마음을 여셨다. 우리들이 할머니를 ‘츤데레(까칠하게 굴면서 잘해주는 타입)’라고 부르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이번 설에도 할머니는 후쿠가 좋아하겠다며 전 하나를 들고 후쿠에게 갔다. 먹이면 안 된다는 내 말이 무색하게 후쿠에게 전을 들이밀었다.
"먹어, 맛있는 거야. 먹어 봐."
다행히 후쿠는 냄새만 맡고 먹지 않았다. 스팸 세트를 선물로 들어왔을 때도 '걔 좋아하겠네?'하고 먼저 후쿠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내가 스트레스 폭발과 후쿠의 심한 공격에 손찌검하고 난 후의 일이다. 주말마다 본가에 가는데 할머니와 텔레비전을 보다가 며칠 전 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부끄러운 일은 감추기 마련인데 그래도 혼날 각오로, 혼나야 하니까 말했다. 할머니는 개도 싫다고 하면서 반려동물 행동 교정 프로그램을 주로 보는데 내 말을 듣자 곰곰이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아주 목줄을 꽉 잡더라고. 오줌을 지릴 정도로 강하게.”
"......."
“근데 손으로 때린 건 본 적이 없어. 못 알아들으니까 그냥 좋게 좋게 길러.”
“할머니, 난 얘가 어디 가서 버릇없다는 소리 안 들었으면 좋겠어.”
“네가 나중에 어디 보낼 거 생각하고 그러는 거 같은데."
“아니! 할머니가 봤을 때, 물고 그런 거 보면 더 싫어할 거잖아. 난 얘가 예쁨만 받았으면 좋겠다고!”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잘 키울 생각만 해.”
그때 이후로 후쿠 이야기를 해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손에 꼽을 정도로 할머니와 만난 후쿠는 할머니 무릎에 올라가거나 할머니의 장난도 잘 받아주는 프로페셔널한 개냥이의 모습을 뽐냈다.
몇 주전, 월요일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어서 본가로 갔다. 나는 오랜만에 오는 삼촌들처럼 밥을 대접받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꾸역꾸역 밥을 차려주셨다. 물론 뒷정리는 내가 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이야기하다가 주방 세정제와 설탕을 사야 한다며 나갈 채비를 하시길래 나도 쫓아나갔다. 황사가 심했지만 날이 따듯해서 길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할머니. 난 후쿠가 유기된 애인지 아니면 길냥이가 난 새끼인지 모르겠어. 진짜 사람을 너무 좋아해.”
“그런 거 생각하지 마. 지나간 일은 잊고 지금, 앞으로 잘 키울 거만 생각해.”
“아니 그래도.”
“때리진 말고.”
후쿠의 미래는 나를 비롯한 우리 가족이 함께 보내는 걸로 정해졌기 때문일까? 자꾸 알 수 없는, 지나간 일에 붙잡히고 붙잡는다. 출생부터 나와 만나기 전 2개월 반. 영영 답을 찾을 수 없는 미지수 X. 가르친 적 없는 뽀뽀를 해줄 때나 침대에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모습, 쓰다듬어도 한 번도 내치지 않고 하악질 한 번 한 적 없기에 더 후쿠의 과거가 궁금하다. 그러나 후쿠 증조할머니의 말을 듣고 생각에 정지 버튼을 누른다.
‘지금, 앞으로 잘 키울 것만 생각하자.’
오늘은 어제가 되고, 내일은 오늘이 된다. 매너가 좋은 과거는 무의식이나 기억의 먼 곳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구질구질한 과거는 바로 어제 일처럼 언제나 내 어깨를 짓누른다.
‘그때, 조금 참았더라면? 가만히 있었더라면?’
그날, 5개월 동안 감춘 퇴사를 고백했다. 할머니한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며 엉엉 울었다. 할머니는 가만히 듣기만 하셨다. 이내 당신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일만 생각해.”
지금, 여기를 외치는 책은 수없이 많다. 읽은 걸 그대로 체득화 할 수 있으면 나는 이렇게 있지 않을 것이다. 알고는 있는데 쉽게 잊히고 실천도 안 된다. 할머니가 해 준 말은 그 어느 책에서 했던 말보다 진한 여운을 남겼다.
‘오늘 일만 생각하자.’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생각이 너무 많다. 일어나지 않을 일을 걱정하고 일어나고 지나간 일을 후회한다. 불안을 자초하고 신경을 예민하게 만든다. 의지적으로 할 때도 있고, 가랑비에 옷 젖듯 습관이 되어 반사적으로 작동한다. 주변에서 생각을 많이 한다는 말도 많이 들었고 친한 사람들일수록 내게 잡생각이 많다고들 했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감정이 같이 들끓는다. 주체할 수 없이 기쁠 때나 슬플 때,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언젠가는 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주인 없는 감정이 덮쳐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할머니가 해준 그 말, 가장 사랑하고 의지하는 사람이 해준 단순하고 확실한 진리에 위로받았다. 정말 아무 생각하지 말고 오늘 일만 생각하자고. 성경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한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다고. 오늘 일. 오늘 주어진 24시간 만을 생각하기로 다시금 느슨해진 마음을 다잡는다.
그날은 황사가 심한 날이었다. 모래먼지 가득해도 구름은 제 자리에 있고 태양은 변함없이 떠있다. 지금 당장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익숙한 그 단어를 다시 외쳐본다.
'지금, 여기.'
그리고 포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