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무대-남사당의 여자들 1

여자의 자리에 남자가 선 뒤

by 응시

무대는 원래 여자의 것이었다.

남사당패를 떠올리면 남자들의 집단이 먼저 온다. 이름부터 그렇다. 남사당(男寺黨). 남자 사당패. 조선 후기부터 근대까지 전국을 떠돌며 공연한 유랑 예인 집단이다. 줄타기, 땅재주, 탈놀이, 꼭두각시놀음, 풍물. 이들의 예술은 현재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그런데 "남사당"이라는 이름 자체가 역사를 숨기고 있다.


사당(社堂)은 원래 여성 연희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사당패는 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노래, 춤, 곡예를 하며 떠돌던 집단이었다. 남자는 거사(居士)라 불렀고, 여사당과 짝을 이뤄 다녔다. 사당이 공연하고, 거사가 뒷바라지했다. 무대의 주인은 여성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뒤집어졌다. 사당패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기예를 갖춘 여성 사당이 부족해졌다. 여장한 남자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됐다. 남자가 여자의 자리에 선 것이다. 이것이 남사당패의 기원이다. 원래 여자의 무대였던 곳에 남자가 들어왔고, 이름에 "남(男)"을 붙여 구분했다.


이름이 달라지면 기억도 달라진다. "남사당패"라는 이름이 정착되면서, 원래 이 무대가 여성의 것이었다는 사실은 묻혔다. 남사당패의 역사를 다루는 기록에서 사당패(여사당)는 전사(前史)로 간략하게 언급되고 넘어간다. 무대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 무대를 이어받은 사람이 역사의 주인이 됐다.


기생과 비교하면 구조가 선명해진다.


기생은 무대를 빼앗기지 않았다. 기방은 끝까지 기생의 공간이었다. 기생이 노래하고, 기생이 춤추고, 기생이 악기를 켰다. 남성은 손님이었지 공연자가 아니었다. 기생은 무대 위의 사람이었고, 마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은 남성의 몫이었다. 기생의 비극은 자유가 없었다는 것이지, 무대를 빼앗긴 것은 아니었다.


사당패 여성은 달랐다. 무대 자체를 빼앗겼다. 자기가 하던 공연을, 자기가 만든 레퍼토리를, 자기 이름이 붙어 있던 자리를 남성이 가져갔다. 남성이 여장을 하고 여성의 역할을 했다. 원본이 사라지고 복제가 원본의 자리에 앉은 것이다.


기생 시리즈 6편 "성스러운 것은 왜 천해지는가"에서 무녀에서 원화로, 원화에서 기생으로 여성의 자리가 하락하는 패턴을 다뤘다. 사당패에서 남사당패로의 전환은 하락이 아니라 대체다. 하락은 같은 사람이 낮아지는 것이고, 대체는 사람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대체가 하락보다 더 철저한 지움이다.


그런데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았다.


남사당패 안에도 여성 공연자가 있었다. 남사당패 출신 최성구의 증언에 따르면, 남사당 말기에는 어름사니(줄타기꾼)나 한두 사람의 여성이 낀 적이 있었다. 소수였다. 기록에 이름이 남은 경우는 거의 없다.


한 사람의 이름이 남았다. 바우덕이(김암덕, 1848~1870). 15세에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됐다. 여성 최초의 꼭두쇠였다. 경복궁 중건 현장에서 공연하고, 흥선대원군에게 천민 놀이패로서는 처음으로 종 3품 직위를 받았다. 22세에 죽었다. 죽은 뒤 남사당패의 역사에서 바우덕이는 "예외"로 기록됐다. 예외라는 분류가 말해주는 것이 있다. 여성이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정상이 아니라는 전제다. 원래 여성의 무대였는데, 여성이 그 무대에 서면 "예외"가 되는 역설.


기생과 바우덕이를 나란히 놓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기생은 무대에 묶여 있었다. 기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무대가 감옥이었다. 바우덕이는 무대에서 풀려 있었다. 전국을 떠돌았다. 자유로웠다. 그러나 그 자유는 소속 없는 자유였다. 기생에게는 기방이라는 울타리가 있었다. 궁녀에게는 궁이라는 담이 있었다. 바우덕이에게는 울타리도 담도 없었다. 1편에서 다뤘던 천민 여성의 자리가 여기서 다시 보인다. 보호 없는 자유. 소속 없는 이동.


바우덕이는 22세에 죽었다. 사인은 불분명하다. 이후 남사당패는 다시 남성 꼭두쇠 체제로 돌아갔다. 바우덕이의 시대는 짧았고, 그 뒤에 여성 꼭두쇠는 나오지 않았다. 문이 잠깐 열렸다가 다시 닫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