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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희곡 <기다리는 사람들>

그 무언가 기다리며 사는 세 사람 이야기 

by 수형 Feb 20. 2025

 나오는 사람

 1         시인

 2         현실적인

 3         이상적인 




막이 오르면, 작은 섬에 사람 셋이 보인다. 


효과     파도 소리


1         (시를 낭송하듯, 큰 소리로) 섬이다. 섬!

2         (낚시하며) 또 시작이다!

1         우주, 그 검은 바다에 둘러싸인 지구도. 세상, 그 깊은 바다에 둘러싸인 인생도.

2         시끄러워!

3         (나무 조각에 글씨를 새기며) 누구라도 소리는 질러야지!

2         듣지도 않는 소리, 질러서 뭐 해?

1         인간, 그 알 수 없는 관계에 둘러싸인 나도. 

1/3     섬이다. 섬!



2         야, 누가 섬인 거 몰라?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잘 때까지, 단 한순간도 바다가  안 보인 적이 없어. 이젠 눈을 감아도 보여! 아주 지긋지긋해!

3         오늘따라 과민반응이야? 

1         그를 기다리는 섬! 별을 기다리는 섬! (기침을 한다)

2         시끄러워! 고기가 안 잡히잖아. 

3         오늘 먹을 건 다 잡았잖아. 

2         그럼 내일은? 

1         염려함으로 네가 새 날을 지을 수 있더냐.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라. 

2         나라고 낚시가 좋아서 하루 종일 이러는 줄 알아? 고기라도 잡지 못하면 이 섬에서  먹을 게 뭐가 있어?  

3         알아, 너 때문에 우리가 먹고 산다는 거. 하지만 사람은 그것만으로 살 순 없어. 희망이 필요해. (병을 집어던진다) 

1         희망, 천칠백 스물아홉.

3         뭐?



2         (다시 낚시하며) 그동안 넌 천칠백 개가 넘는 희망을 저 바다에 던졌어. 

1         (기침하며) 살려다오. 구해다오. 이 답답한 섬에서 우리를 구해다오.

2         그리고 그 대가로 바다는 천칠백 가 넘는 절망을 다시 너에게 돌려줬고. 쓸데없는  짓, 그만해. 소용없어.

3         (따로 보관한 병을 보이며) 천칠백 개, 아니 수만 개가 넘는 절망이라도, 단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괜찮아. 너도 알지? 이건 육지에서 보내준 희망이야. 

1         기다리고 기다려라. 새벽빛이 검은 바다를 가르고 붉은 태양을 꺼내리니, 어두운 밤을 두려워말고 별을 노래하며 기다려라.  

3         올 거야. 누군가, 꼭 올 거야. (병을 집어던진다)

1         희망, 천칠백 서른.

2         속이지 마. 우리도, 너 자신도!

3         뭘 속여? 

2         육지에서 보냈다는 구원의 메시지. 알아, 니가 써서 던진 거잖아.

3         무슨 소리야? 아니야!

2         아니고 싶겠지. 그동안 니가 던졌던 천칠백 서른 개의 희망을 부정하고 싶지 않겠지.  (병에 담겨 있던 메시지를 보이며) 봐! 이거 니 글씨야! 

1         (심하게 기침하며 불안한 목소리로) 기다려라. 그는 온다. 아니야. 오지 않는다. 아니야. 온다. 아니야. 오지 않는다. 

2         희망? 그따위 낭만으로 현실이 바뀔 것 같아? 차라리 나처럼 고기를 잡아. 아님,  이 병들을 모아서 뗏목이나 만들어. 그 빈병으로 더 절망하게 만들지 말고.

3         아니야, 거짓말하지 마.

2         이젠 너도 미쳐가고 있어. 저 녀석처럼...

1         폭풍이 일면, 파도가 미쳐. 세상이 망가지면 우리도 미쳐! 



3         육지에 살 때도 그랬어. 꿈꾸는 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어. 잘못된 현실을 고발하고, 망가진 구조를 바로잡고, 사욕에 물든 권력자를 바꾸고, 서민들의  잠자는 의식을 깨우치면, 세상이 바뀔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렇지가 않더라고.  바꾸면 다시 썩고, 고치면 다시 망가지고, 깨우치면 다시 잊어버려. 

2         그게 세상이고 현실이지.

3         생각보다 현실은 무서웠어. 그런데 그거보다 더 무서운 게 뭔지 알아? 그동안 믿었던 내 신념을 부정하는 거. 다시 오지 않을 빈병을 기다리더라도 이걸 던질 때가  제일 행복해.

1         (계속 기침을 하며 아파한다) 

3         저 친구도 시를 쓰고 노래할 때가 행복하겠지. 

2         행복일지, 위안일지... 난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어. 어떻게든 현실에 맞춰 살려고 했지. 그게 현실적이니까. 남들보다 빨리 경제적 기반을 만들고, 안정된 직장생활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미래를 대비해서 저축하고 보험 들고, 시골에 땅도 사 두고. 

3         철저하셨네. 

2         그런데 이상하게 맘이 편하지 않아. 세상은 빨리 변하고, 늘 예측을 뛰어넘으니까.  점점 나이는 들어가고, 몸은 약해지고. 부족하지는 않았지만 늘 불안했어. 아니 뭐가 부족한 지, 그걸 모르겠어.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모든 게 불안했지.  내가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점점 보이지 않아. 

1         (기침을 하며) 저기, 누군가... 온다... 저기... 

2         차라리 미쳐서 저렇게 기다리면 행복할까...

3         (뭔가 발견하고) 미친 게 아니야. (깃발을 들고 흔들며) 여기! 여기!


효과      비행기 날아가는 소리 


2         연기를 피워! 깃발을 흔들어! 어이! 어이!

1         온다. 온다. 그날이 온다. 기다렸던 그날이 온다!

3         여기! 여기! 우리 여깄어. 구해줘! 구해줘!

2         어이! 어이! 여기야! 여기! 제발 구해줘!

3         제발! 제발!

2         여길 봐! 여길 보라고!

1         간다. 간다. 그리고 기다림은 온다.

3         지쳤어. 기다리는 거, 지쳤어. 제발... 제발...

2         갔어. 또 지나갔어.

1         기다리고 기다려라. 새벽빛이 검은 바다를 가르고 붉은 태양을 꺼내리니, 어두운 밤을 두려워말고 별을 노래하며 기다려라.  

3         시끄러워!

2         누구라도 말은 해야지.

3         듣지도 않는 말, 해서 뭘 해?

1         섬이다, 섬. 우주, 그 검은 바다에 둘러싸인 지구도. 세상, 그 깊은 바다에 둘러싸인  인생도. 

2         다시 기다려야지. 육지에서도 그렇게 살았었어.

1         인간, 그 알 수 없는 관계에 둘러싸인 나도. 섬이다. 섬!

3         뭘 기다려... 누굴 기다려... 언제까지 기다려...

1         그를 기다리는 섬! 별을 기다리는 섬! (기침을 한다)


효과      파도 소리


막.




#후기

나 역시 오늘도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고 있지 않은가. 무얼 기다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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