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으로 행복하기
요즘 참 이것저것 버거운 일들이 많았다. 속이 시끄러운 상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며칠이 흘렀다. 정리되지 않은 기분이 계속 찝찝했다. 벌려놓은 약속들을 해치우느라 주말마저도 어영부영 흘러갔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겨우 혼자 집에서 휴식할 시간을 확보했다. 몇 시간 남지 않은 주말,
우울한 기분을 달래려면 나에게 뭐가 필요할까?
남이 해준 맛있는 음식 시켜먹기, 아무 생각 없이 깔깔 웃을 만한 예능 프로그램, 뒤통수가 얼얼하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영화, 은근히 취기가 오르는 혼술, 꼭 필요는 없어서 사지 못했지만 갖고 싶던 물건 사기.
누구나 자신만의
'우울 퇴치 n종 세트'가 있으리라.
내 우울 퇴치 세트는 저런 것들인데, 안타깝게도 최근에 모두 경험해 보아서 효용이 옅어졌다. 쓸 수 있는 카드를 이미 다 써버린 절망적인 상황. 뭘 하며 행복을 찾을지 발을 동동 구르다, 홀린 듯이 밀린 집안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계속 치워야지, 치워야지, 말만 했던 미지의 영역이 눈에 밟혔다. 종류 구분 없이 아무 옷이나 구겨 넣어져 있는 침대 밑 서랍장, 안 쓰는 샘플과 꼭 필요한 매일 쓰는 아이템이 어지럽게 섞여 있는 화장대 수납칸, 살이 빠지고 커져서 입을 수 없는 바지들, 한 번 입고 어쩐지 불편해서 안 입는 치마, 못 본 척하던 주방 한 구석의 기름때, 어쩐지 습해 보이는 수세미 등등. 모두 겉으로 보기엔 심각하게 더럽거나 눈에 거슬리진 않아서 꼭 치우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아마 지금까지 용케 살아남았겠지.
왜인지 모르겠으나 하나하나 다 손대고 싶었다. 일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시끄러운 청소기로 온 집안을 활보하는 엄마에 빙의한 듯이, 오늘만큼은 오버해서 모조리 치우고 싶은. 그래서 결과적으로 아주 많은 물건과 옷을 버렸다. 쓰지도 않을걸 알면서도 화장품 샘플을 고이고이 보관했는데, 오늘만큼은 단호하고 매정하고 가차 없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오래된 수세미는 뻑뻑한 새것으로 교체하고, 요리할 때 튀었던 기름때 얼룩도 슥슥 닦았다. 저녁으로 먹을 라면을 사러 가는 길에 쌓여 있던 택배 쓰레기와 분리수거까지 완료했다.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어찌나 속이 시원하던지.
오늘부로 나의 우울 퇴치 세트에 한 가지 카드가 더 추가됐다. 엄두가 나지 않아서 혹은 애써 모른 척 해왔던 물건과 집안을 정리하기. 많이 버리면 버릴수록 퇴치 효과가 좋은 것만 같다. 쓰레기통에 다 버려 버리고 샤워까지 하니, 이런 리프레시가 없다. 해로운 관계인 걸 알면서도 잠깐의 아픔이 두려워 전전긍긍하다가, 끝내 이별하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마음과 같달까. 다음 우울감이 찾아오면 오늘마저 외면했던 샤워 부스 물때 청소로 해야겠다. 그때를 위해 그 청소는 좀 아껴둬야지..(절대 귀찮아서 안 하는 게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