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런 길을 가게 된다고 말할 수가 없네요.
하지만 그게 그렇게 될 리가. 화제는 금세 다시 시장의 충격으로 옮겨갔고, 곧 누가 누가 더 아프게 맞았는지 겨루어 보는 '불쌍함 챌린지'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내가 더 아프니까 넌 걱정 안 해도 된다' 식의 짠내 나는 격려를 서로 주고받다 보면 어느새 진짜 심각한 상황에 처한 이들에 대한 얘기가 나오게 되는데, 대체로 중요한 펀드의 성과 부진이 오래되어서 자금 회수가 예정된, 혹은 예정될지도 모르는 이들에 관한 얘기를 주된 소재로 삼는다. 누가 성과가 얼마나 망가졌는지, 그래서 고객이 어떤 생각인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간단히 분석(이라 쓰고 뒷담화라 읽는다)해 본 뒤에, 과연 남아있는 카드가 뭐가 있는지, 매니저는 책임을 져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가늠해 보면서 내가 그 처지가 아님에 안도한다. 사실 남이 죽어간다는 상황을 공유하며, '우리는 아니다'라는 안도감으로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참 비겁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가장 솔깃해지는 얘깃거리임에는 틀림이 없다. 잔인하게도 말이다.
'펀드매니저의 숙명'이란 얘기를 자주 들어왔다. 잘 안될 경우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재계약 불발 내지는 퇴사라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 직업이 가지고 있는 변할 수 없는 속성이며 숙명이라고 말이다. 앞서 나눴던 대화와 같은 내용이 나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얘기란 것을 마음 깊은 곳에서 깨닫고 있을 터이다. 나 이외에도 다른 동료들도 아마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래서 티는 안 내더라도 만약을 대비해서 다들 먼저 업계를 떠난 양반들의 행적은 어떠한지 궁금해하는 것이 아닐까. 안부 인사를 가장해서 요새 잘 지내시는지 살짝 걱정 어린 말투로, 동시에 자존심을 건드리면 안 되니까 마치 당연히 잘 지내시는 것처럼 기술적으로 교묘하게 근황을 묻는다.
'그래, 그분은 요새 어떻게 지내신대? 돈 걱정 하실 양반은 아니실 텐데.'
사실 진짜 묻고 싶은 건 이거다.
'매니저는 관두면 대체 뭐 해야 해요? 우린 은퇴 준비 어떻게 해야 하나?'
개인적으로 앞서 매니저의 길을 지나간 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 현역에서 본격적인 업무를 하던 때가 IMF 전인지 후인지. 왜냐하면 우리나라 금융시장이 본격적으로 지금의 형태를 갖추면서 돌아가던 때가 IMF 이후이기 때문이다. IMF의 의미는 우리나라 금융시장에서 매우 크며, 그전과 후로 분명하게 나뉜다. 다양한 영향이 있지만, 금융시장에서는 'Mark to Market',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시가평가'라는 제도가 그때 도입되기 때문이다. 그전까진 주식시장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금융시장은 장부가평가, 한마디로 거시경제나 금리 변동에 관계없이, '우리 이런 방식으로 평가하자'라고 하고 평가를 했었다. 그 의미가 얼마나 큰 건지 최근 금리가 오르면서 생기는 일들을 생각해 보면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IMF 이전에 본격적인 매니저 생활을 하신 분들, 즉 1998년~2000년 즈음에 30대 중반 이후 40대였던 분들은 조금 커리어 패스가 다르다고 개인적으로 느끼고 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규모 채용시대에 입사해서 금융시장의 시가평가 시기를 본격적으로 맞이하기 전에 이미 다른 형태의 금융, 한마디로 '관'과 '인간관계' 등에 의해 크게 좌우되던 금융시장을 보내셨던 분들이 많다. 이 세대는 공과를 떠나 커리어가 지금과는 다른 길을 가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은퇴 대비하는 것도 지금 매니저로 활동하는 세대와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60대로 지금은 최고위 경영진급이 아니면 이미 은퇴를 한 상황이다. 찾아가서 물어보기도 어렵다.
따라서 이 세대의 매니저들이 걸어간 길을 참고하기엔 적절하지 않다. 그래도 비슷한 금융환경 속에서 활동한 이전 세대, 즉 이제 50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까지가 이러한 세대일진대, 문제는 이 세대가 이제 막 금융시장에서 은퇴를 맞이하는 문턱에 와 있다는 점이다. 즉 IMF 이후의 금융시장을 제대로 보내고 은퇴하는, 어찌 보면 진정한 첫 세대이다. 한마디로 나침반이 없는 상황이라는 얘기다.
일단 참고할 만한 사례가 부족하니, 스스로 물어보고 주변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물어본다.
은퇴하면 뭘 해야 하지?
그런데 뭘 해야 하는지 정말 몰라서 묻는 걸까?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보자.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내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자.
사실 나이가 들어서 환경이 좀 바뀌었을 뿐이지, 처음 사회에 발을 내딛을 때와 접근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몇 가지 조건이 붙은 상태지만, 사실은 은퇴라는 앞으로 다가올 현실에 대한 접근방식은 첫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와 다를 것이 없다. 남은 인생은 80~90세, 혹은 100세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투자업계에서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하는 나이인 55세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최소 15년, 많게는 25년은 더 일할 기간이 남아있다. 첫 취업으로부터 지금까지 약 20년 가까이 사회생활을 했으니, 지금까지 한 만큼 '첫 은퇴' 이후 또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첫 사회생활 시작할 때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럼 처음에 어떻게 사회생황을 시작했었던가? 타임머신을 타고 되돌아가본다. 일단 내가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본다. 처음부터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데 영업직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숫자를 뒤지다 보면 울렁증이 생기는 데 회계사를 열망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는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어떤 면들이 조금씩이라도 녹아있는 직업을 찾아서 희망 대상 군으로 분류해 두는 것이 처음 했던 일이었다.
그다음에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조건들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 두 번째였다. 투자를 좋아한다고 해서 영어가 안되는데 싱가포르, 홍콩, 런던이나 뉴욕 등에 있는 금융회사에 취직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포츠를 좋아한다고 해서 1주일에 1시간 운동하는 내가 스포츠 선수단에 들어갈 수 없듯이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구분하고, 해당 분야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세워보는 것이 이 단계에서 이루어졌던 일들이다.
그다음에 고려했던 것은 꼭 갖춰줘야 할 조건들이었다. 단지 연봉 얼마 이상 이런 희망사항이 아니라 정말 최소한으로 이것은 지켜져야 한다는 것들이다. 예를 들면 최소 생활비는 얼마니까 그 정도는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임금의 마지노선, 앞으로 커리어를 발전시켜 나가야 하니 최소한 금융권에는 진입할 수 있는 경력을 쌓을 수 있는지 여부 등과 같은 것들이다.
마지막으로 고려했던 것은 이 모든 것이 안되었을 때 제일 마지막까지 하기 싫은 것들을 미리 골라두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 힘쓰는 일은 개인적으로 체력이 약해서 너무 하기 싫었다. 그리고 문과생이었던 관계로 문과생이 회사의 헤게모니를 쥐기 어렵던 첨단 제조업의 후선부서로 가기는 더욱 싫었다.
두 번째 사회생활 입문을 준비하기 위한 절차도 동일하다. 원하는 것을 찾고, 할 수 있는 것을 알아보고, 꼭 필요한 점들은 무엇인지 체크한 다음에, 정말 하기 싫은 일들을 제외해 보는 것이다. 이 순서대로 나의 은퇴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일단 무엇보다 먼저 하고 싶은 게 뭔지 알아야 한다. '첫 은퇴' 이후로 못해도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해야 할 일이다. 원하지 않는 일을 하는 것만큼 힘든 것은 없다. 최대한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몇 가지 면에서 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야 한다. 인생 2막을 완전히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괴롭게 지내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이가 들면 입이 가벼워진다고 하던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일을 하고 싶어졌다. 20여 년 직장생활 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정치, 문화 등이 어우러져서 결국 시장의 가격으로 표출되는 메커니즘을 경험하면서 지냈기에, 그 작동방식을 알려주고, 그 원리에 숨어있는 의미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한 꺼풀이나 밝히는 일이 재미있어졌다. 펀드 운용할 때 보다 신입사원 교육 시간을 더 즐기는 나를 발견한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또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충분하길 원한다. 사회에 나와 아직은 짧은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하지만, 직업 특성상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리고 가장 크게 놀란 것은 세상에 배워야 할 것이 너무너무 많다는 점이다. 펀드 매니저는 한 가지 분야를 장인처럼 깊게 알지 못한다. 다만 큰 그림을 이해하고 개념을 정립해야 어떤 변화가 가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마치 이차전지 소재를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지는 몰라도 그 변화가 이차전지 업계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도는 알아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다양한 분야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공부'를 해야 한다. 그뿐인가. 돈이 되는 시장을 알기 위해 엔터테인 분야도 알고, 미술 시장도 기웃거리고, 와인과 음식 분야, 골프를 비롯한 스포츠, 국제 정세를 이해하기 위한 각 국의 역사도 알아본다. 그러다 보면 각 분야에 본업이 아님에도 깊은 이해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내 부족함을 느끼게 되고, 그들의 대단함에 감탄하게 된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고, 그런 기회가 많이 생길 수 있는 제2의 삶을 원한다.
할 수 있는 것을 알아봐야 할 단계이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단계가 가장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렸다. 원하는 바와 할 수 있는 바를 구분해서 알아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단 간단히 생각해 보면, 가르치고 알려주고자 하니 선생님이나 시간강사와 같은 계열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자격이 없다. 또는 많은 교류와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을 원하기에 바로 생각나는 것은 큰 연구소 등이지만, 이건 공부를 정말 많이 하신 분들이 생각할 길이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본다면 스스로 알려서 할 수 있는 강사, 강연자 정도이다. 이것이 브런치를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내 경험을 알리고, 강의자료로 쓸 수 있는 것들도 만들면서 강연과 출판의 기회를 언젠가 잡아보기 위한 방법이다. 다른 방법은 정말 열심히 업무에 매진하고 살아남아 회사의 고위 임원으로 올라가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사실 운이 많이 따라주어야 한다. 이것 말고도 아직 알아보지 못한 기회와 영역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고 생각한다. 안되면 기회를 만들면 된다.
꼭 필요한 조건들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경제적인 부분이다. 처음과 달리 가족이 있기에 부양이 가능한 경제적 수준인지가 이제 정말 중요해졌다. 그리고 얼마나 길게 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달려있다. 길게 하지 못한다면 최소한 이를 보상할 수 있는 만큼 저축이 가능한 수준인지도. 그리고 나이가 든 만큼 건강 문제가 걸려있다. 건강에 무리를 줄 여지가 얼마나 되는지도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하기 싫은 것이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과도하게 몸이 힘들지 않은 생활을 하고 싶다.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깨달음을 얻게 되어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몸에 스스로 위축되지 않아도 될 정도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몸에 힘쓰는 일을 하는 것은 싫다. 나이 들수록 더욱 더워지면 힘들고, 추운 건 싫다. 몸은 편하고 싶다. 그리고 아무 변화 없이 정해진 일을 하루종일 하는 단순한 일은 더욱 싫다. 단순 반복되는 일상이 누군들 좋겠느냐만은 인생 2막에서 하기는 더욱 원하지 않는다.
은퇴 이후에 원하는 나의 삶을 다시 읽어보면, 꿈같은 이야기가 많다. 하지만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 준비할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점은 준비할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을 '지금 알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은퇴 후에 돈이 얼마가 필요하다는 점을 넘어, 무엇을 해야 하질 정해두는 것은 첫 사회생활을 준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퇴 준비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다. 미리 준비한 자들의 강력함을 우리는 이미 첫 사회 진출할 때 면접장의 동료들로부터 느끼지 않았던가.
또한 펀드매니저로서의 삶은 다행히 이러한 부분에 있어 적어도 도움이 되는 부분이 많다.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와 자본주의 세상이 돌아가는 이면을 엿볼 수 있는 점, 다양한 분야를 접해보고 심도 깊은 세미나 등을 아주 많이 들어볼 수 있다는 점들은 준비하는 데 있어 상당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게 해 준다. 하다못해 트레이딩 스킬이라도 단련되어서 나중에 은퇴 후 경제적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직 많은 이들이 가지 않아서 어떤 경로가 만들어지는지 알려주는 선구자들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많은 열린 결말이 준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게임보다는 자유도 높은 게임이 더 재미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않을까. 게다가 눈을 조금만 넓혀서 국내를 넘어가면 더 많은 기회가 있을 수 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외국어를 공부할 10여 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나는 아직 배고프다.
[표지그림 : Unsplash의 Mateo Serrano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