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미국에서는 모든 거리에 이름이 붙어 있다. 새로 생긴 신도시는 1가, 2가, 3가, A가, B가, C가 처럼 순차적인 이름을 붙이지만 조금씩 도시가 발전하면서 거리의 이름들은 다시 제정되곤 한다.
예를 들어 LA 한인 타운을 관통하는 올림픽 블러바드는 1932년 LA 올림픽을 기념하여 기존 10가의 이름을 바꾼 것이라 한다.
이렇듯 미국의 많은 거리의 이름은 지속적으로 바뀌어 가는데 유명 인사들의 이름으로 바꾸는 경우도 종종 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워싱턴, 노예해방의 링컨 대통령 등 유명 인사의 이름을 딴 거리는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이제는 미국의 한인 역사가 오래되다 보니 한국인의 이름도 미국의 거리에서 종종 마주치게 된다.
LA 다운타운을 가로지르는 10번과 110번 고속도로 교차로는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호를 딴 도산 인터체인지이고 LA 한인타운에는 한때 도산 우체국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러한 위인이 아니었음에도 마을 주민들의 청원으로 시골 마을 거리에 이름을 남기신 ‘순자 할머니’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30여 년 전 필자의 지인은 차를 타고 미국 방방곡곡을 둘러보며 루이지애나 남부 흑인 마을 지역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다 할 큰 도시도 없고 변변한 주유소 보기도 힘든 곳을 지나가면서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낯익은 이름을 보게 됐다. Soon Ja St. 얼핏 봐도 영어가 아닌 친숙한 한국 이름 ‘순자’라고 쉽게 읽히는 거리의 이름이었다. 한국인은커녕 백인들조차 들어오기 꺼리는 낙후된 남부 시골 흑인 마을에서 순자라는 이름이 주는 낯선 반가움에 그들은 그 길로 차를 몰고 들어갔다.
길은 생각보다 짧았고 그 길이 끝나는 막다른 곳에는 낡은 시골집이 있었다. 집 입구에는 손으로 페인트를 묻혀 적은 Market이라는 허름한 간판이 있었고 이내 이곳은 이 낙후된 마을의 공동 구판장 같은 마켓임을 알게 됐다. 마침 목이 마른 터라 일행들은 마켓으로 향했고 들어간 김에 순자 스트릿에 대한 궁금증도 풀어 보고자 했다.
가정집 1층을 개조한 마켓은 높게 쌓인 선반 때문에 낮에도 햇빛이 들어 오지 않았고 어두침침하고 약간은 정리 안된 마켓에는 흑인 남매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우선 갈증을 해결하고자 음료수를 마시면서 천천히 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들어 오던 길 이름이 ‘순자 스트릿’인데 혹시 한국 이름이 아닌가 하고.
그들 남매는 덤덤하게 이야기했다 순자는 본인들 할머니의 이름이라고. 순간 귀를 의심했다. 흑인 남녀들의 할머니가 순자라고? 순자는 한국 이름인데 할머니가 순자란 뜻은? 맞았다 순자는 한국인 할머니였고 그 남매는 그 할머니의 손자 손녀였던 것이었다.
한산한 시간이어서 잠깐 시간을 내서 순자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6.25전쟁 당시 고아로 발붙일 곳 없던 순자 씨는 흑인 미군 병사를 따라 미국에 오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남편의 고향으로 온 순자 씨는 동양인은커녕 흑인 이에 외는 아무도 찾지 않는 흑인 농장 지대로 오게 됐고 그곳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일을 하면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자 한국인인 순자 씨는 그렇게 미국시골 흑인 마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기 시작했다. 차츰 대화도 통해가며 낯선 이방인에서 마을 사람으로 동화해 가며 여생을 평범하게 자녀를 낳고 손주들을 보면서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마켓이 되어버린 그 집은 순자 할머니와 남편이 살던 집이고 순자 할머니는 매일 아침 집에서부터 마을을 가로지르는 거리를 깨끗이 쓸었다고 한다. 묵묵히 거리를 청소하던 그녀에게 마을 사람들은 마음의 문을 열게 되고 평생을 그 동네에서 살아온 순자 할머니는 결국 그곳에서 눈을 감게 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마을 사람들은 생전의 순자 할머니를 기려 순자 할머니 집에서부터 마을을 관통하는 길을 Soon Ja St. 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미국은 묘비명 이외에도 공원이나 산책로 등지에 돌아가신 분들의 이름을 기리어 그분들의 이름을 새긴 벤치 등을 기증하는 문화가 있다. 하물며 고인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거리의 이름은 상당히 큰 명예로 생각하기도 한다.
화려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은 소소한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남부 어느 흑인 마을에는 평생 고향을 그리며 외롭게 살았지만 마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아름다웠던 한 한인 여성 순자 할머니가 기억되고 있고 마치 포카혼타스의 한국판 이야기처럼 잔잔한 한인 이민야사(移民野史)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