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민족에도 속하지 못한 혼혈아들
미국은 이민자의 나라이다. 가장 많은 백인들조차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왔으니 원래 있던 원주민들을 제외하곤 다들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한국인들처럼 나중에 이민 온 사람들은 미국인들에게 텃세나 인종차별을 겪거나 이민자의 서러움 등을 한 번씩은 겪어본 경험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 같은 이방인들 속에서도 또 다른 이방인들이 있었으니, 한국도 미국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한때 튀기라는 비속어로 불렸던 혼혈아 들이다.
미국에서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두 명의 혼혈 친구가 있었다. 한 명은 아버지가 스페인계 미국인으로서 주한미군으로 와 있던 스페인 아버지와 한인 어머니 사이 태어난 친구였고, 또 다른 친구는 주한미군 백인 아버지와 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혼혈이었다.
점심시간에 학교 식당을 가다가 뒤에서 누군가 “라면 한 그릇 먹고 싶네!"라고 한국어로 외치길래 뒤돌아봤는데 한국인이 안 보여 두리번두리번거렸다. 그때 만난 친구가 스페인 혼혈 친구였다. 나중에 친해지고 들은 얘기인데 자꾸 중남미 라티노들이 자기한테 스페인어를 해서 힘들었다고 한다. 하긴 중남미 사람들은 미국 인디언과 스페인 혼혈이 많은 편이라 한국 어머니와 스페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난 친구는 내가 봐도 영락없는 멕시칸의 모습이었다.
나중에 백인 혼혈 친구를 데리고 와서 다들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다. 한땐 백인 혼혈 친구가 부러웠던 적이 있었다. 백인들과 비슷하니 영어만 잘하면 인종차별 같은 건 없으리라 생각했다. 스페인 혼혈 친구도 서구적인 모습이라 미국에서 금방 적응할 것 같았다.
70년대 80년대 한국에서 혼혈 가수들이 인기가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인순이, 박일준, 윤수일 등의 혼혈 가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혼혈 중에서도 은근히 흑인 혼혈을 좀 더 무시하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두 친구의 인생도 한국에선 그리 나눠졌다고 한다. 스페인 아버지 혼혈은 중남미계 라티노처럼 까무잡잡한 피부에 작은 키였고 백인 혼혈은 약간은 동양적인 얼굴이 남아 있지만 금발에 밝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둘에게 주어지는 사회적인 대접은 한국에선 꽤 많이 달랐다고 한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같이 미국에 온 이 친구들은 한국어밖에 못했고 미국에서는 다 똑같은 이방인이었을 뿐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도 몇 년간 연락되던 친구들은 삶의 방향이 달라지면서 이제는 동창회에서 물어봐도 소식을 아는 사람들이 없다. 성인이 되어 가면서 그 친구들은 LA의 한인 혼혈 모임에 더 많이 어울리게 됐고 당시 그 친구는 모임에서 소개받은 트럭 운전으로 미국 방방곡곡을 다니느라 가끔 연락하며 점차 멀어지게 됐다.
당시엔 몰랐는데 결국은 그 친구들도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또 다른 이방인으로 이질감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인지 나중에는 혼혈 친구들끼리만 모이는 그룹에 어울렸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알게 모르게 나조차 그 친구들을 차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세월이 지나 이번엔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가 백인인 혼혈 친구를 만났다. 한국어를 못하는 친구였는데 (그 친구의 한국인 아버지조차 영어권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종 차별 문제는 그 친구에겐 전혀 없을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 친구도 나름대로 고충이 있었다. 100% 백인 외모가 아니기에 어딜 가던 어느 나라 사람이냐?라는 질문을 종종 받고 심지어 영어를 잘한다고 칭찬하는 백인들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친척 모임에 가면 백인인 이모들과 사촌들의 외모와 다르기에 어릴 때 차별을 많이 받고 컸다고 한다. 이모들이 사촌들과 그 친구와 같이 어울리는 것을 은근히 싫어해서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국 친구를 사귀어 보려고 노력도 했었는데 한국말도 못 하고 백인 외모가 섞인 모습에 한인들 사이에서는 외국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백인들에게도 이방인, 한인들에게도 이방인, 그러한 혼혈 친구들의 고충을 그때까지도 몰랐었다.
요즘 한국도 다문화 가정이 많은 상황에서 동남아시아 혼혈 친구들이 이모나 고모 사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한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
과연 이 친구들의 뿌리는 어디일까? 이방인 무리에 섞여 어울리지 못하는 또 다른 이방인들의 이민야사(移民野史)는 언제쯤 사라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