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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켄PD Sep 13. 2023

애니깽 할머니의 자장가

100년전 멕시코 애니깽 이민역사

필자가 LA에서 휴대전화기 가게를 하던 20여 년 전 당시의 일화이다. 당시 휴대폰은 고가이기도 하고 계약도 필요해서 신용 조사는 물론이고 18세 이상만 계약이 가능하던 때였다.


하루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멕시칸 소녀가 가게에 와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휴대폰을 구경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가지고 싶어 하던 눈빛으로 이것저것 가격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너무 어려 보였기에 나이를 물었고 아직 18세가 안 됐기 때문에 어른을 모시고 와야지 계약이 가능하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설명을 듣곤 그 소녀는 할머니를 모시고 와도 되냐고 물었고 나는 할머니의 신용 점수만 좋다면 할머니 허락하에 휴대폰을 개통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다음날 그 멕시칸 소녀는 할머니를 모시고 다시 가게로 방문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멕시칸 소녀 뒤에는 할머니가 따라 들어오고 계셨다. 그런데 할머니의 모습은 멕시칸이 아니라 우리가 한국에서 흔히 보던 주름이 가득한 꼬부랑 한국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너무나 이질적인 느낌에 소녀와 할머니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소녀는 이내 할머니와 스페인어로 이야기했고 할머니 역시 능숙한 스페인어로 대화를 했다. 소녀는 할머니를 모시고 왔으니까 휴대전화를 개통해 달라고 했다.


이해가 힘든 상황이라 저분은 누구시냐고 물었고 소녀는 본인의 친할머니라고 이야기했다. 누가 봐도 한국 할머니처럼 생겨서 의아해하고 있는 나에게 소녀는 할머니는 꼬레아노(한국인) 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아, 그럼, 이 소녀가 한국인 핏줄이 있는 소녀인가?

할머니가 한국분이라고 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드리는데 한국어를 모르시는 눈치이다. 영어로 여쭤봤지만, 영어도 못 하신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배운 스페인어로 더듬더듬 할머니께 여쭤봤다.


¿Eres coreano?(한국분이세요?)

Si(예 맞아요)

¿Puedes hablar coreano?(한국어 가능하세요?)

Un poco(조금이요)


영어도 한국어도 거의 모르시는 이 한국 할머니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때 할머니가 더듬더듬 알고 계신 몇 마디 한국어를 하신다.

“이쁘다…”, “우리 아가…”

그러더니 자장가를 부르신다 “자장자장 우리 아가…”


아, 이 할머니는 멕시코에서 태어나셨구나. 옆에서 손녀가 설명을 해준다. 할머니의 아빠 엄마는 먼 옛날 멕시코 노동자로 와서 할머니는 멕시코에서 태어나고 멕시코 할아버지와 결혼하고 아빠를 낳고 본인이 태어났다고.


하와이 이민이 있던 시절 또 한 무리는 옥토와 신천지를 찾아 멕시코 농장으로 속아서 이민 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애니깽’ 이라 부른다.


애니깽은 용설란의 품종 중 하나인 헤네켄(Henequen)의 스페인어 발음인 '에네꿴'을 한국인 노동자들이 ‘애니깽’으로 알아들은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찔리면 살이 썩어 들어가는 가시가 돋친 척박한 에네꿴 농장에 속아서 온 이들은 고향을 그리면서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할머니는 그러한 애니깽 정착민의 2세였던 것이었다. 어릴 때 듣던 몇 마디의 한국어가 할머니의 어머니가 해주던 “이쁘다”, “‘우리 아가” 같은 단어였고 자장가였다.


한국인도 거의 없던 불모지에서 태어나자마자 멕시코 사람들과는 다른 외모로 평생을 얼마나 외롭게 살아왔을까?


연민과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기억이 생각나 덤덤하게 자장가를 부르시던 애니깽 2세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 드렸다. 어릴 때 돌아가신 친할머니의 손처럼 주름이 가득한 앙상한 손이었다.


뭉클한 마음을 붙잡고 할머니께 한국말을 했다. “할머니 건강하시고 꼭 오래오래 사세요"

이해는 못 하셔도 내 눈빛을 보고 할머니도 짐작하는 눈치이다.
Si, Si, Muchas Gracias (그래요 너무 감사합니다) 한국 할머니의 어울리지 않아 보일 듯한 스페인어 대답에 가슴이 울컥해졌다.


다음날 할머니의 아들과 며느리도 같이 방문했다. 아마도 할머니가 이곳 가게 주인이 한국인이라고 이야기한 듯하다. 아들의 눈빛은 한국인의 피가 보인다.


100여 년 전 미국도 아닌 낯선 멕시코에서 정착한 한국인들이 있었고 우리들도 모르는 그들의 후손은 또 이렇게 미국에 자리 잡고 일가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애니깽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민야사(移民野史)의 자장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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