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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켄PD Oct 21. 2023

미국 최초의 오렌지족

한인 최초로 오렌지 카운티에 입성한 남자

한국인 최초의 오렌지족은 누구일까

90년대 한국에서 오렌지족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강남 부유층 자녀들이나 귀국한 유학생들을 지칭하던 말이었는데 당시 수입산 청과류가 비싸던 시절 오렌지의 상징성도 있었으나 LA인근의 부촌 오렌지 카운티에서 유학생들이 오면서 생겨났다는 얘기가 좀 더 유력하긴 하다. 지금도 한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남가주 LA 카운티의 옆 카운티인 오렌지 카운티는 평화롭고 안정된 미국 이민의 삶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195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은 유색인종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이었다. 심지어 한국인들이 차를 타고 이 동네를 다니면 주민신고로 인해서 경찰 검문을 받았다는 이민 선배들의 이야기도 있다. 영화 The Banker를 보면 1960년대 흑인들은 당시 집을 구매하기도 힘들고 융자받기도 힘들어 결국 백인 바지 사장을 내세워 은행을 사버린 흑인 사업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처럼 당시에 유색인종에겐 지독한 차별과 편견이 남아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 남자 다이빙 금메달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LA인근 부촌 오렌지 카운티에 처음으로 입성한 사람이 있었으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 더 잘 알려진 새미 리 박사이다.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자의 아들로 캘리포니아 프레즈노에서 태어난 새미 리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미국 역사상 최초 남자 다이빙 금메달을 받았다. 이후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또 최고령 다이빙 선수로 금메달을 받아 올림픽 금메달 2관왕을 획득했다.


1930년대 인종 차별이 있던 시절 유색 인종들은 백인과 같은 풀장에서 함께 연습을 할 수가 없었다. 백인들이 연습하고 새로 물을 갈기 전 몇 시간만 유색인종들에게 수영장을 개방했다. 새미 리처럼 당시 라틴계, 아시아인 및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수영장 물을 빼고 물을 채우기로 예정된 전날인 "국제의 날"이라고 불리는 수요일에만 패서디나에 있는 인근 브룩사이드 파크 플런지(Brookside Park Plunge)를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조건에서도 남는 시간에는 코치가 집뒤에 파놓은 모래 구덩이로 뛰면서 다이빙 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러한 악조건에서도 올림픽 금메달을 2개나 미국에 안겨준 영웅이었지만 현실의 대우는 그렇지 못했다. 수영 특기생으로 USC대학에 진학을 했지만 금메달리스트의 삶 이후 군의관 생활을 마치고 1950년 중반 이비인후과 의사로 진로를 바꾸게 된다. 금메달리스트와 의사의 영예가 있었지만 막상 한국인인 그가 1954년 오렌지 카운티에 집을 사려고 하니 중계인들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집을 팔기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주민들이었던 백인들의 반발도 컸을 것이다. 심지어 인근 주민들은 주택 구입을 방해하는 청원서 서명을 제출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렌지 카운티에 처음으로 입성한 한국인

어느 날 새미 리 박사가 주변인들에게 했던 하소연이 신문 기사로 나오게 됐는데  “미국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2개나 안겨준 스포츠 영웅이 집을 사려고 했는데 거절당했다”라는 기사가 나오면서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 전 37대 대통령이 화를 내면서 당장 새미 리가 집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일화가 있다. 그렇게 새미 리 박사는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오렌지 카운티에 첫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 새미 리 박사가 없었다면 한국인들의 오렌지 카운티 입성은 훨씬 더 늦춰 줬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오렌지 카운티, 한때 부유한 유학생들을 지칭하던 오렌지족의 시조는 새미리 박사가 아닐까 싶다. 그분이 없었으면 오렌지족이라는 단어조차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 금메달을 2개나 안겨주고 이비인후과 닥터로 당당하게 살아왔던 그는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을 이기고 동등하게 미국에서 살아 나갈 수 있도록 많은 이민자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너희들의 능력을 실력으로 보여줘라, 말로 다할 줄 안다고 떠벌리지 말라" 라며 유색인종들이 미국에서 살아나아가야 하는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제는 LA 코리아타운 한복판 올림픽 불러버드와 놀만디 애비뉴에 그의 이름을 딴 ‘새미 리 광장’과 웨스트모어랜드 애비뉴에는 ‘새미 리 박사 메디컬 헬스 사이언스 영재 초등학교’가 남아서 반세기 전 인종차별과 불평등에서도 굴하지 않고 우뚝 설 수 있었던 그의 정신이 이민야사(移民野史)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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