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나리보다 훨씬 전 1950년대 아칸소 한인
1980년대 미국 시골 아칸소주를 배경으로 한 '미나리'라는 영화가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한 아칸소 주이지만 사실 아칸소는 농장만 많은 시골이다. 면적은 남한의 1.37배나 되지만 인구는 3백만 명 조금 더 사는 흔히 말하는 소가 사람보다 많다고 하는 시골이다.
30여 년 전 사회 초년생일 때 회사에서 사용하는 컴퓨터를 단체 구입하기 위해 산타모니카 인근 컴퓨터 샵을 방문했다. 당시 거의 백인 일색의 세일즈맨들이 있었는데 유일하게 체격이 좋은 동양인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말을 곧 잘하는 한국인이었고 백인들 사이에서 매장을 총 관리 하는 매니저였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금보다 인종차별은 심한 편이어서 한인이 백인을 관리하는 모습은 쉽게 보기 힘든 상황이긴 했다.
한인 매니저는 같은 한국인이라고 회사 컴퓨터 몇 대를 구입하면서 좋은 가격으로 제공해 줬고 그 뒤로도 여러 도움을 받을 일이 있어 매장에 들르면서 형 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사도 알게 되었다.
그 형님의 고향은 아칸소, 집안은 목장을 한다고 한다. 소가 400마리 돼지가 1,000마리 3달에 한 번씩 닭은 몇천 마리씩 도살을 한다고 한다. 대충 계산해 봐도 꽤 부농이었다. 그러한 목장을 놔두고 멀리 먼 이곳 LA까지 와서 매장 매니저를 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보이지 않은 벽이 있었기에 프랜차이즈 매장의 본사에서 이사급으로 승진이 되지 않으면 나중에 그만두겠다는 그 형님의 말대로 결국 형님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아칸소로 가서 목장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6.25 전쟁 당시 전쟁고아가 됐던 형님의 아버님은 당시 따르던 미군을 따라 전쟁이 끝나고 미국 시골 아칸소에 정착하게 됐다. 목장은 양아버님의 조상부터 대대로 물려온 것이라고 한다. 목장이 워낙 크고 인구밀도가 당시에는 더 낮았던 아칸소였기에 가장 가까운 집은 5마일, 가장 가까운 한국인의 집은 250마일 이상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형님의 아버님은 성인이 되자 미군에 지원을 하게 되고 그린베레 부대에 입대해 주한미군에 지원을 했다고 한다. 주한미군으로 한국에 거주하면서 부모님은 전쟁통에 돌아가셨지만 어릴 때 추억을 더듬어 친척들을 찾게 되었고 본인의 성(당시 양아버님의 성을 따라 미국이름이었다)과 뿌리 몇 대 손등의 정보를 알아 왔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는 동안 한국여성을 만나 미국에 같이 오게 된다. 그 여성은 형님의 어머님이다.
미국이라고 왔지만 한국인은커녕 미국인을 보려 해도 차 타고 가야 하는 농장이었기에 영화 미나리의 80년대 배경보다도 더 황량한 50년대의 아칸소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국어가 서투른 아버님은 어머님께 자녀들의 한국어 교육을 부탁했고 한국음식을 구하기 힘든 아칸소에서 한국에 부탁해 편지 봉투에 씨앗을 받아 아칸소 농장에서 배추, 무, 고추, 메주콩등을 심으면서 메주까지 띄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요즘은 씨앗 밀반입등이 큰 문제이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크게 관여를 안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억척스러운 한국여성의 노력으로 결국 한국인 보기 힘든 아칸소에서 김치를 담그고 메주를 띄워 된장과 고추장을 만들고 한글을 자녀들에게 가르친 덕분에 한국말도 곧잘 하면서 한국음식도 먹는 자녀들을 키웠던 것이다.
어릴 때 유일한 동양인으로 놀림을 많이 받아서 나중에 대학 때문에 대도시에 가면서 태권도장을 알게 되고 태권도와 각종 무술을 배우면서 몸집도 키워 나가고 당당하게 미국인들 사이에서 살아왔다고 한다. 그 형님의 아버님은 양아버님의 성을 따라 미국 이름이지만 자녀들에게는 한국에서 찾은 어느 집안 몇 대손의 어느 성인이 알려주서 한국 성을 사용하고 있다.
지금도 한국인이 많이 살지는 않는 아칸소 주, 당시에는 더더욱 한국인 보기도 힘들었겠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한국인의 뿌리와 음식 그리고 언어를 지키고 살았던 한인가족의 이민야사(移民野史)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