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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켄PD Oct 08. 2023

영주권 찾아 삼만리

남미에서 미국까지 불법 이민을 하던 그 시절

어릴 적 보던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만화가 있었다. 주인공 마르코가 엄마를 찾아 이탈리아를 떠나 삼만리를 헤맨 끝에 만난다는 스토리였는데 얼마 전 어떤 유튜브에 실제로 마르코가 여행한 거리를 만화 스토리 내용으로 전개해서 계산해 봤는데 실제로 삼만리였다는 내용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한국의 1리는 0.4킬로가 조금 안되고 3만 리를 킬로로 계산하면 대충 11,783km 정도가 되었다. 오래전 남미에서 미국으로 왔던 선배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르헨티나에서 LA까지 대충 거리가 얼마나 될까? 직선항로 거리가 9,900km 정도니 육로로 따지면 3만 리가 대충 될 듯하다.


그 선배의 미국 이민이 떠올라 숙연해졌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3만 리나 넘는 거리를 넘어 미국으로 왔을까? 나중에 영주권을 받고도 너무나 덤덤했다는 그의 독백을 잊을 수 없다.


미국으로 이민온 경로는 다양하다, 전쟁고아로 오신 분, 유학생으로 오신 분, 미군 남편을 따라오신 분, 가족 초청, 멕시코 애니깽의 후손, 그리고 196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라과이등으로 농업이민을 갔다가 미국으로 오신 분등 각기 사연은 다양하다.


1963년 브라질로 1차 이민단이 고국을 떠났다. 어딘지도 모르는 지구 반대편 브라질에 가면 옥토를 주고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열심히 자기 농장을 이루며 살 수 있다는 희망으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등의 나라로 떠났다.


하지만 막상현실은 수백 헥타르의 땅이 있다 한들 황무지였고 가시덤불을 걷어내고 강풍 우박등을 막는 방풍림도 심어야 하고 해충 피해도 막아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당장 식생활부터 해결해야 했다. 볼리비아로 이민을 갔었던 가수 임병수 씨가 TV에 나와 아버지가 숲에서 원숭이를 잡아 네 다리와 머리를 자르고 멧돼지라고 속여서 가족들을 먹였다고 했던 이야기가 기억났다. 그들의 삶은 문명과는 동떨어진 원시시대의 삶에서부터 개척한 것이다.


당시 남미 집단 농업 이민은 실패한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혹독한 환경을 견디고 7-8만 명 이상의 교민들이 남미에서 견디며 생활을 꾸려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남미 이민자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미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후손들에게만큼은 겪었던 고난을 넘겨주기 싫었던 남미 이민자들은 자녀들을 미국의 대학으로 보내려고 노력을 했고 한국인 특유의 교육열과 노력으로 많은 남미 이민 2세가 미국 대학으로 이민도 오게 되었다.


한편으론 다른 중남미인들이 미국에 불법으로 입국하려는 시도처럼 미국으로 어떻게 하던 입국을 해 보려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어차피 남의 나라에서 고생하느니 이왕이면 미국에서 고생하는 것이 더 성공의 지름길이라고 믿던 사람들은 불법 이민 브로커를 따라서 미국 입국을 계획하게 된다. 선배네 가족도 그리했다. 온 가족이 한꺼번에 미국에 올 수가 없으므로 맏아들인 선배와 선배의 아버님이 먼저 미국으로 밀입국해서 돈을 벌은 뒤 가족들을 차례대로 데려 온다는 계획이었다.


몇 날 며칠이 걸려 다른 중남미 인들과 함께 멕시코 까지 올라왔고 이제는 멕시코에 미국 국경만 넘어 한인들이 많이 산다는 LA까지만 도착하면 소정의 목표는 이루는 것이다. 하시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특수 개조 트럭 바닥에 숨어서 미국 국경선을 넘던 트럭은 갑자기 험난하게 차를 몰기 시작했고 국경 수비대의 사이렌 소리에 갑자기 차를 세우고 무조건 산으로 도망치라는 브로커의 긴급한 목소리를 듣는다. 무더운 여름 에어컨도 없던 트럭 바닥 좁은 틈에서 신발도 못 신고 맨발이 찢기며 산으로 쫓기고 경찰견의 추적을 받으며 산속을 헤맸다. 


결국은 국경수비대에 체포된 선배와 아버지는 구치소에 며칠 감금되어 있다가 도로 멕시코 국경으로 보내졌다. 당시 1년간 모았던 미국 정착금도 트럭과 함께 압수되고 둘의 주머니에는 고작 $500불 정도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도로 아르헨티나까지 가기에도 경비가 모자라고 멕시코까지 왔는데 포기할 수는 없기에 브로커에게 책임을 물어 며칠 후 다시 밀입국을 시도해서 겨우 겨우 LA에 오게 됐다. 


선배 이야기로는 본인은 그나마 행운이라고 한다 어떤 한인 여성은 국경수비대에 쫓기다 길을 잃어 몇 주간 밥도 제대로 못 먹으면서 해충과 맹수들이 우글 거리는 사막을 헤매다가 겨우 겨우 구조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LA로 온 뒤 선배와 아버지는 $250불씩 나눠 가지고 따로 숙식을 제공해 주는 한인 업소에 일하면서 1년을 생이별로 지냈다고 한다. 가끔씩 공중전화를 통해 아버지에게 안부전화를 선배를 지켜보던 옆 가게 사장님이 사연을 듣고 차도 없던 선배를 데리고 가서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세월이 지나 취업을 하고 취업비자를 받고 영주권을 신청하고 지금은 모든 가족들이 다 모여서 미국에 살고 있지만 막상 영주권을 받았을 때 뭐 하나 바뀐 것 없는 현실에 너무나 허무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가슴을 때린다. 한국에서도 머나먼 남미 그리고 그 남미에서 더 잘살아 보겠다고 3만 리를 헤매 미국까지 온 것이 결국은 이 영주권 하나로 끝맺음을 하는구나.


남미에서 유학으로 왔던 불법으로 이민을 왔던 이곳에 정착한 남미 교민들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그들은 LA 다운타운 의류시장 자바의 주축으로 많은 성공을 이루어 왔다. 요즘도 미국 국경을 목숨을 걸며 넘어오는 중남미 사람들 그 사이에는 아직도 한인들이 있을까?


한국이 힘들던 60년대 조금이라도 잘 살아 보겠다고 남미를 통해 미국까지 3만 리를 건너온 이민야사(移民野史)는 이제는 더 이상 보기 힘들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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