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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나 Jan 20. 2021

그럴 거면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들어오라는 말

고작 1억이 없어서


“그럴 거면 다 때려치우고 다시 집으로 들어와!”


드디어 아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왔다.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들어오라’는 이건 여느 부모의 자식 사랑이 게장의 간장처럼 스며든 위로의 말이 아니다. 위로의 말이었다면 내가 저 문장 뒤에 느낌표를 붙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빠의 말은, ‘그렇게 취직 안(못)하고 있을 바엔 지금 독립해서 사는 집 정리하고 엄마 아빠 집으로 들어와라’인데, 여기에는 너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박탈하겠다는 징벌의 의미가 더 강하다. 여느 때 같았으면 ‘아, 뭔 소리야! 내가 지금 어떻게 다시 집으로 들어가!’ 라며 소리쳤을 나는 이번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내가 집으로 어떻게 들어가 -> 왜 못 들어와 -> 내 살림이 얼만데 -> 다 팔고 버리고 정리해라 -> 고양이는 어쩌고 -> 그놈의 고양이!’ 이와 같이 결국 마지막 화살은 고양이에게 돌아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너 내일모레면 마흔이다! 정신이 있냐 없냐? 그 나이에 모아둔 돈이 1억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솔직히 내일모레 마흔이라니, 이 대목에서 더 상처 받았다. 나는 올해 서른셋이 되었는데, 내일을 내년, 모레를 내후년으로 쳐도 내일모레면 서른다섯이니 마흔은 5년이나 남았다. 나는 이 점을 지적하려다가 관두었다. 어차피 지적해봤자 고함 폭격이 날아올게 뻔하기 때문이다. 지적할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내일모레 마흔이면 1억 정도는 다들 모아두는 건가요...? 그런 건가요...? 나만 이상한 나라에 사는 건가요...?


애초에 오늘 본가에 들른 것이 잘못이었다. 경기도에서 1시간 30분을 운전해야 할 수 있는 본가 근처에서 면접이 잡힌 것이었다. 면접이 끝나고 집에서 저녁을 먹고 가기로 했다. 면접 자체는 별로 느낌이 좋지 않았고 (흔들리는 멘트 속에서 네 꼰대 향이 느껴진 거야) 아빠는 ‘일단 자차 운전으로 출퇴근하기에 너무 멀고, 오늘 면접이 별로였다’는 말을 듣자마자 소리를 지른 것이다.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사실 나는 전 회사에서 사내 트러블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을 겪다가 퇴사했다. 어느 회사든 힘든 점이 없겠냐만은, 사람을 부품 취급하는 회사, 상품을 팔기 위해 누군가 죽길 바라는 회사, 그렇게라도 이슈를 만들어서 매출을 올리려고 하는 회사의 태도에 충격을 많이 받았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일할 순 없는 걸까.

그래서 이직처를 조금 더 신중하게 고르고 있을 뿐이다. 게다가 집에서 재택근무로 투잡을 하고 있다. 하지만 부모님에겐, 안정된 직장이 없으면 그저 한심한 백수일뿐인가 보다. 내 동생은 20대 후반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 부모님한테 한심하다, 걱정된다는 소릴 들었다. ‘저 자식 저래서 나중에 어떻게 먹고살까’ 했는데 지금은 공무원이 되었다. 그리고 뒤늦게 방황기를 겪는 나는 - 사실 나는 방황기가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 이제 동생을 대신해 한심한 자식새끼가 되었다.


엄마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고양이들을 원망하는 눈치다. 내가 고양이만 없었어도, 본가에 다시 들어가거나 서울에 방을 얻어 더 좋은 곳에 취직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고양이 때문에 니 인생 망칠 거니?”(이 정도면 대놓고 말하는 건가?)


엄마, 엄마는 자식 때문에 인생 망칠 것 같으면 자식 버릴 거예요?


나는 이 말도 꾹 삼켰다. 애초에 고양이는 내 인생을 구원하고 있지 결코 망치고 있지 않다. 그 전제부터가 틀렸다.


집으로 운전해서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전자담배를 피웠는데 갑자기 연초담배도 땡겼다. 연초가 땡기다니, 지금 꽤 스트레스를 받았구나. 나는 언제인가부터 나의 슬프고 우울한 상태를 인정하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슬프고 우울한 상태를 인정하면 그동안 한 우울증 치료가 도루묵이 되는 것 같고, 스스로 패배한 기분이 들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는 나’는 ‘괜찮은 상태’이고 ‘생각하는 내가 바라보는 나’는 슬픈 상태라고 인지하는 것이다. 일종의 자아분리 같은 거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치자면 내 탄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아무것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직장은 없지만 돈을 벌고 있고, 지금 내가 들어선 길이 잘못된 길인지 아닌지는 이 길을 다 걸어봐야 알 수 있다. 결국 죽을 때가 되어야 판가름 날 것인데, 죽을 때가 되어서 내 선택 하나하나를 ‘잘했다’ ‘잘못했다’ 평가하고 있는 건 또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맥주 한 잔과 담배 한 대로 털어버리고 그냥 가던 길이나 계속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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