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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보나 Feb 23. 2021

집에 가스가 끊겼다

나랑 눈사람 만들래...?

지난 1월 26일, 그날은 평소와 다름없이 끔찍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우울증 환자에게 모든 아침은 끔찍하게 느껴지지만 월요일은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평범하게 끔찍할 줄 알았던 그날은 아침 이르게 날아든 문자 한 통으로 특별하게 끔찍해지고 말았다.


<도시가스요금이 미납되어 부득이하게 가스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무려, 1월, 겨울의 한가운데에, 집에 가스공급이 끊긴 것이다. 그것도 '요금미납'을 이유로! 만약 내가 그때 오렌지주스를 마시고 있었다면 어느 아침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입술 사이로 주르륵 내뱉었겠지만 다행히 나는 입에 아무것도 물고 있지 않았다. 내가 물고 있던 것은 한 줌의 공기와 두 줌의 어이없음이었다. 마치 H 2개와 O 1개가 만나 H2O가 되듯 공기반 어이없음 반은 내 입에서 자음 ㅎ이 되어 튀어나왔다.


"허....!!! 하....!!!!! 흐어....? 히익????????"


그렇게 하히후헤호 가갸거겨를 다 훑을 기세로 당황하던 나는 그나마 없는 정신의 부스러기를 주섬주섬 긁어모아 나름대로 생각이란 걸 하기 시작했다. 나는 요즘 거의 깡통 수준으로 전락한 뇌에게 어서 맷돌을 돌릴 것을 명령했다. 깡통 뇌라도 굴리지 않는다면 추위에 얼어 죽어 얼음 화석으로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도시가스 뭐 어쩌고에서 전화를 받은 기억이 났다. 당시에 문자메시지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고객님, XX동 ***번지 맞으시죠? 가스요금이 6개월 미납되셔서 안 내시면 1월 26일에 가스공급이 중단되거든요."


이어서 마치 피구를 하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쓰러졌는데 갑자기 돌아가신 아빠가 응원하러 뭉게뭉게 나타나듯   장면이 떠올랐다. 지난 토요일, 낯 모르는 남자가 우리 집 벨을 누른 일이었다. 내가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와서 3분쯤 뒤에 벨이 울렸고, 그는 검은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상했다! 그래서 집에 없는 척을 했는데, 혹시 가스공사 직원이라든가... 그렇다든가.... 그랬던 것일까? 허겁지겁 문을 열어보니, 공동현관 편지함 앞에 ‘가스공급 중단 안내장’이 붙어 있었다. 아, 아아... 이제 이 건물 사람들이 모두 우리집에 가스가 끊긴 걸 알게 되겠구나!


사실 나는 요즘 생활 전반에 대한 집중력이 심각하게 떨어져 있다. 수도 요금, 전기 요금, 건강 보험, 자동차세 등등 지로로 챙겨서 내야 하는 각종 공과금 및 세금을 한두 달씩 밀리기 일쑤였다. 설거지도 미루고, 청소기 돌리는 일도 미루고, 돈 내는 일도 미루고, 모든 일을 미루며 살고 있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기억하지도, 계획하지도 못했다. 도저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의사는 날이 풀리고 일조량이 조금 늘어나면 차차 나아질 거라고 했지만 결국 이런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다만 수도 요금이나 전기 요금처럼 한두 달이 아닌, 공급이 중단될 때까지 밀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내가 가스 요금을 ‘어플’로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6개월 전에 핸드폰을 신형으로 바꿨고, 어플을 자동으로 옮길 때 도시가스 어플이 옮겨지지 않은 것이다. 푸시 알람이 오지 않자 생활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나는 그대로 가스 요금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가스란... 그저 숨 쉬듯 집에 공급되는 거라고 생각했을 뿐. (우리 집이 왜 이렇게 따뜻한지, 어째서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나!)


밀린 가스요금은 약 30만 원이었다. 나는 없는 살림에 다급히 30만 원을 문자메시지에서 안내한 계좌로 송금했다. 이제 가스가 공급되나? 그런가?

.... 그렇지 않았다.


가스공급을 재개하려면 전화를 걸어 ‘제가 돈을 냈으니 가스를 다시 공급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말해야만 했다. 나는... 나는... 전화가 너무 싫고, 이런 일로 전화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왜냐. 창피했기 때문이다. 물론 비록 내 잘못이기는 하나, 집에 가스가 중단된 것은 내 인생의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였다. 마치 내가 의무를 다하는 모범시민에서 대가도 치르지 않고 가스를 펑펑 써댄 불량시민의 나락으로 추락한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날 가스요금 체납자라고 손가락질하겠지...


나는 눈꼬리에 눈물을  조금 매달고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XX동 ***번지에 사는 이보나입니다. 저.... 제가 가스 요금을 체납해서... 그... 중단되었다고... 제가 입금을... 했습니다만....”

“네에~ 재공급 신청하겠습니다~”


통화는 간단하게 끊겼다. 나는 호다닥 뛰어가 온수가 나오는지, 보일러가 돌아가는지 확인해보았다. 아무 반응도 없는 걸 보니, 공급 중단이 바로 풀리진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집중력이 떨어졌다고 해도 이런 사태까지 오다니, 문득 내 상태의 심각성이 느껴졌다. 집에 가스가 끊길 정도라면, 나 더 이상 혼자서는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아닐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플을 켜고 ‘가스요금 자동이체’를 신청해두었다.


허둥지둥했던 하루였지만 괜찮다, 앞으로 공과금을 잘 내면 된다, 그냥 브런치에 쓸 에피소드가 하나 생겨서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공과금을 꼬박꼬박 챙겨서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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