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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17. 2024

시댁에 인사드린 첫날, 트로트를 불러 제끼다.

첫인사, 그리고 어머니

우리는 마음이 급했다. 한시라도 살림을 합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결혼식은 안 하지만 절차라는 것이 있으니 양가 부모님께 동거 허락을 받아야 한다. 우리 집에는 받았고 이제 남편집에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남편집은 꽤 먼 곳이다. 차를 타고 용산역까지 가야 하고  용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거의 다섯 시간을 가야 하는 곳이다. 나는 여행도 별로 안 해봤던 사람이라 이렇게 먼 길을 처음 가보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 집을 거의 8년 만에 처음 가보는 거였다. 그동안 연락도 잘하지 않고 자주 가지 않았던 모양이다. 왜 그랬냐고 하니 그냥 장가도 제때 못 가고 자리도 못 잡는 것 같아 자격지심에 자주 못 갔다고 한다. 오랜만에 집에 가는 이유가 결혼할 여자를 소개해주러 가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일이 끝나고, 저녁에 기차를 타고 새벽에 도착하는 스케줄이었다. 무척 피곤하여 남편 어깨에 기대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드디어 도착하였다. 새벽 5시였다. 역에서 택시를 타고 시골집 초입에 내렸다.


마을 입구에서 어머니가 미리 나와 계셨다. 야위시고 짪은 파마머리가 뽀글뽀글한 여느 시골 촌로의 모습이었다. 너무 오랜만에 아들을 보는 것이니 어머니는 잠도 못 주무시고 나와 계셨던 것이다. 남편이 몇 걸음 먼저 걸어가서 어머니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한다는 소리가.


"장가보내주쇼."였다.


어머니는 반가워하고 눈물 지으시면서도 황당해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년 만에 엄마를 봤으면 안부부터 물어야 되는 것 아닌가. 어째 처음 만나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내 얼굴이 부끄러웠다.


그런 어머니에게, 남편 등뒤에서 어색하고 뻘쭘하게 첫인사를 건넸다.

 

남편이 나고 자란 시골집은 우리 외갓집이랑 상당히 비슷했다. 마당이 있고 마당에서는 강아지를 키우고 화장실이 밖에 있었다. 기와집 지붕이 있고 많이 낡은 집이었다.

우리는 새벽에 도착했으므로 일단 잠을 먼저 자고 아침에 일어났다. 잠시 후 큰 형님 내외가 들어오셨다

나는 어색하지만 싹싹하게 인사했다.(이제부터 호칭은 큰 아주버님, 큰 형님으로 한다.)


큰 아주버님은 키가 크시고 말이 별로 없으시고 점잖으셨다. 아버님이 안 계시니 큰 아주버님이 아버님 같고 어려웠다. 큰 형님은 인상도 좋으시고 딱 맏며느리 같았다.


어머니와 형님은 며느리 될 사람이 왔는데 별로 말이 없으셨다. 그날 일이 마늘을 까야 됐었는지 방 가득 마늘만 까신다. 나도 가만있을 수는 없으니 눈치껏 마늘 까는데 동참하였다. 마대자루 한가득 마늘의 양이 너무 많아서 질릴 지경인데 어디선가 마늘이 가득 든  마대자루가 계속 나왔다. 도대체 마늘 까는 일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시댁에 처음 인사 드리러 와서 계속 마늘만 까니 '나는 누구? 여긴 어디?'현타 오는 기분이었다.


계속 마늘만 까던 어머니가 심심하니 노래 한 자락을 불러보라고 하신다. 아마도 어머니는 그냥 장난 삼아 툭 던져본 말일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제안을 덥석  물었다. 어차피 나는 얌전한 현모양처 며느리상도 아니고 품성이나 얼굴로 승부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어필할 마음이었다.


나는 예전에 사차원교육주식회사 다닐 때 회식에서 트로트를 불러서 인기를 끌었었다. 트로트는 꺾어줘야 제맛이다. 나는 안 한다고 빼는 성격이 아니라서 바로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우렁차게 불렀다. 조금 창피하지만 이 어색한 분위기를 뒤집어야 한다.


어머니는 박장대소를 하시며 웃으셨다. 큰 형님도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성공이다.'


그제야 낯설었던 내 마음도 풀어지고 분위기가 좋아졌다. 뒤이어 어머니도 노래 한 자락을 하시고, 큰 형님도 가느다란 목소리로 옛날 노래를 부르신다. 마늘을 까며 새 며느리 될 사람이랑 돌아가면서  노동요를 부른 것이다.


그때부터 시댁에 가면 나는 어머니의 웃음 담당이다. 어머니는 내가 무슨 말만 하면 최불암 아저씨처럼 박장대소를 하셨다. 큰 형님 둘째 형님은 어머니를 어려워하는 게 있었지만 나는 어머니가 편했다. 명절에 내려가면 염색도 해드리고, 부끄럼도 없이 목욕탕도 같이 가고, 어머니 옆에서 말동무도 해드리며 같이 잤다. 항상 나를 보면 웃어주시니 나도 어머니가 좋았다.




우리 어머니는 아프시기 전까지 반찬 깻잎을 시장에 팔아서 가정에 보탬을 많이 주시는 능력자 어머니였다. 직접 농사지은 깻잎을 절여서 매콤하게 양념해서 시장에 내다 파셨다. 진짜 너무너무 맛있는 깻잎 반찬이었다. 아프시기 전까지 오래도록 하셨다. 어머니는 항상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웠던걸 알고 우리가 용돈을 드리면 한사코 안 받으셨다.


어느 날 어머니 아프시기 전에 일이다. 가족들이 모두 잠들었을 때 어머니가 나를 심각하게 부르셨다. 뭔 일인가 어머니 곁으로 갔더니 신문지에 꼭꼭 싼 만 원짜리 뭉텅이를 쥐여 주셨다. 누가 깰세라 아무도 모르게 주셨다. 깻잎 팔아서 모은 만 원짜리로 모두 하나하나 모은 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삼백만 원이었다.  우리가 많이 어려웠던걸 어떻게 아시고 주신 거였다. 목구멍이 '왁'하고 막히며 소리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 얼른 가방에 넣으라고 손짓하시는 어머니시다.


집에 와서 신문지에 싸인 돈을 열어보았다. 꾸깃꾸깃 구겨져 성한 돈이 없었다.  꾸깃꾸깃 구겨진 돈 하나하나가 어머니 사랑으로 느껴졌다.


'어머니는 어떻게 이 돈을 모으셨을까. '


감히 쓸 수 없는 돈이었다. (어머니는 이 돈을 큰딸 학비에 보태라는 명목으로 주셨다.)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기까지 우리 큰 형님이 많이 힘들었었다. 40년 이상 모시니 얼마나 힘드셨을까. 매일매일 같이 사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니 어머니와 좋았던 것 힘들었던 게 있지만, 나는 가끔 가니 어머니와 좋기만 했다.


그리고 다행히(?) 남편이 미리 어머니 속을 썩여놔서 상대적으로 나는 남편을 바로 살게 만든 며느리라 이뻐하셨나 생각도 든다.
나는 어머니가 준 사랑만큼 효도를 못했다. 너무너무 받기만 했다. 심지어 요양원에서조차 정신이 온전치 못하실 때인데 약과랑 전을  꿍쳐두셨다가 나를 주셨다.


어머니 이야길 하려던 게 아닌데 처음 인사드리러 간 이야기를 하니 어머니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난다.  난 또 글을 쓰며 깨닫게 된다. 미처 기억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사랑. 나도 사랑받았었네. 어머니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매주 수요일 발행하려던 글을 매일 발행하기로 변경했습니다. 그 모든 글들이 준비되었기 때문입니다. 오십이 넘어서부터는 우리의 남은 인생이 5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시간이 별로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급합니다. 빨리 자서전을 끝내놓아야 마음 푹 놓고 두 다리 뻗고 잘 것 같아서 그리 결정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지겨워도 매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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