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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Aug 31. 2024

남편이 나랑 결혼 한 이유

선택적 백치미

속았다.


평생 속은 줄 몰랐다.


나는 남편이 나랑 결혼한 이유가 뭔가 그래도 나에게 '매력적'인 모습이 있어서 결혼한 줄 알았다.  여자 남자가 만났으니 결혼까지 가려면 서로 끌려야 하니까.


내가 남편을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내 기준에 잘 생기고 키 크고 순박했다.  약간의 백치미라고 할까 뭔가 어설픈 모습이 내가 채워줘야 될 것 같은 모성애를 자극했다. 덩치에 안 맞는 정제되지 않은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이러나저러나 해도 일 순위는 '외모'였다.


나는 남자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무서운 아버지와 살았으니 공격적인 사람은 무서웠다. 그런 가정환경이면 결혼 안 할 만도 한데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다. 순박하고 잘생긴 남편이 친절하고 잘해주기까지 하니 좋았다. 공격적인 면이 하나도 없었다. 내 말을 참 잘 들었다.


나는 똑똑한 남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똑똑하고 말 많으면 내가 말할 기회가 없으니 재미없다. 나는 상대가 무엇을 모르면 가르쳐 주거나 안내해 주는 것을 좋아한다. 남편은 모르는 게 있으면 나에게 묻고 나는 친절하게 알려주고는 했다.


결혼생활이 오래됐는데 남편은 나를 선택한 이유를 잘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대충 얼버무리거나


"안 좋아하면 결혼하나."


대충 그런 정도만 말하니 뭔가 뜨뜻 미지근하다. 좋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꼭. 그걸 말로 해야 하나." 이런다. 


 "당신 보이시한 여자 안 좋아하는데 나랑 왜 결혼했어."


어떡해서든 이유를 알아내고 싶어 이렇게 캐물으면


"나도 콩깍지가 씌었었나 부지." 이런다.


나는 명확한 답을 못 들은 채 뭔가 찜찜한 채로 애를 넷이나 낳고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역시나 남편은 내가 채워줘야 되는 사람이었다. 좀 많이 채워줘야 되는 사람이었다. 어마어마한 모성애를 발휘하며 남편을 많이 참아줬다. 잘생긴 남편을 만난 대가는 혹독했다.


남편이 힘들게 한 이야기는 지난 글에 많이 썼으니 여기까지 쓴다. 그렇게 인내의 세월을 보냈다.


얼마 전, 남편은 나를 선택한 이유를 결혼 27년이 지난 후에야 솔직하게 털어놨다. 애를 넷이나 낳고 이제 마누라가 도망 안 갈 거라 생각했는지 이제야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나는 남편의 '나랑 결혼한 이유'를 듣고 경악했다.


'속았다.'




남편은 입이 가벼운 사람이다. 마음속에 무엇을 담아두지 않고 꼭 말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남편은 나랑 결혼 한 이유를 이십칠 년이 지나도록 알려주지 않았다.


드디어 얼마 전에 말을 해줬다. 소파 아래 앉아 있던 남편이 나를 보고 한마디 한다.


"응. 나는 외모를 안 봤어.'


 '엥? 외모를 안 봤다고? 그렇게 이쁘다고 해놓고서는..'


"외모를 전혀 안 보고 성실한가 똑똑한가 그거 하나만 봤어."


'이런. 그동안 내가 이쁘다고 한 것은 거짓말이구나.'


남편은 본인이 좀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자신을 잘 이끌어줄 사람을 선택했던 것이다. 애들을 잘 키울 것 같은 사람을 선택한 것이다. 남편이 결혼 이십칠 년이 지나서야 털어놓은 이유를 알았다. 왜냐면 내가 그 이유를 듣고 기분이 오묘하고 뭔가 더 찜찜해졌기 때문이다. 기분이 나빴다.


아니 그렇게 나를 좋아하더니 외모는 전혀 안 봤다는 것이다. 철저히 외모만 본 나는 평생 남편 뒤치다꺼리하느라고 고생했는데 철저히 외모를 안 본 남편은 내 덕에 편안히 두 다리 뻗고 잔다.


순간 진짜 승자는 남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나보다 훨씬 현명했던 것이다. 남편은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는 냉철하고 아주 잘 한 선택이다.


남편의 선택이 옳은 이유는 아이들 교육부터 집안일까지 내가 머리를 쓰고 남편은 뭐든지 잘 모른다고 한다. 어려울 때마다 백치미를 발휘한다. 뭐든지 할 줄 모르고, 모른다고 하니 내가 다 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요리도 남편이 중국집 주방장이었으니 훨씬 잘한다. 그런데 항상 못한다고 하니 내가 다 했었다. 간혹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요리를 한 적이 있는데, 아이들은 아빠가 한 것이 훨씬 맛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것도 못 하는 척한다. 그럼 나는 남편이 못한다고 하면 믿는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에 자신이 잘 모르겠을 때 참 나에게 질문을 많이 한다. 나는 일일이 설명을 잘해준다. 남편은 편하다. 항상 세상의 궁금증을 나를 통해 해결하니 말이다.


결혼 생활에서 백치미를 발휘했던 남편인데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는 가장 똑똑함을 발휘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울 여자를 잘도 찾았다.


나는 다른 데는 다 똑똑한 척하는데 배우자 선택에 있어서 외모에 눈이 어두워 성격을 자세히 보지 못한 것이다.


남편은 간헐적으로 백치미를 발휘하고 실상은 똑똑했던 것이다.


그동안 남편을 헐렁하게 봤는데 내가 잘못 본 것이다.


진정한 승리자는 남편이다. 선택적으로 백치미를 발휘해서 나의 모성애를 자극했는데 이것도 작전(?)인 것이다. 골치 아픈 일은  내가 다 해결해 주니 본인은 편했다.


이것을 털어놓을 때 남편의 표정이 웃겼다. 되게 똑똑해 보였다. 나는 링 위에서 한방의 펀치를 맞고 KO 패를 당한 권투선수처럼 멍한 상태가 됐다. 나는 여러 잽을 날렸지만 지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


나의 표정은 그야말로 멍한 백치 상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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