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필력 Sep 02. 2024

글씨를 연습하고 삶의 노선을 바꾸다.

봉인해제의 신호탄

글씨를 연구하는 필체 연구가의 책제목에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를 본 적이 있다. 어쩌면 그 말이 마법처럼 들어맞았는지 나는 캘리를 배우며 삶의 노선이 바뀌었다. 좋은 사람을 만났고 취미가 직업이 되었다.


나는 캘리그래피 배우는 것을 삼수를 했다. 대학도 아니고 운전면허도 아니고 글씨 쓰는 것을 삼수라니, 꼭 배워야 할 운명이었나?  두 번 모두 첫날만 배우고 안 갔다. 이유는 기초과정 선 긋기가 성질에 안 맞았다.


2년 동안 학부모회를 잘 끝마치고 났더니 왠지 허전했다. 마침 SJ대학교에서 중장년을 대상으로 캘리그래피를 무료로 가르쳐 준다길래 배우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선 긋기만 넘어가 보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 하기 싫은 것은 안 하면서 살았는데, 하기 싫은 선긋기만 넘어가 보기로 했다.  앉아서 차분하게 연습하는 게 성질에 맞지 않았지만 선긋기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다. 내가 하고 싶은데로 살던 방식에서 안 가본 일도 해보기로 한 것이다.


매일 글씨를 예쁘게 쓰기 위해 연습헀다. 연습해도 나아지지 않는 내 모습을 참아가며 계속 연습했다.


글씨에 곁들이는 수채화도 배우는데, 와 초등학생보다도 못한 솜씨인 거다. 미술 센스가 완전 '꽝'인 것이다. 남들보다 마이너스 50점으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교실에서 당연히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는데 정말 못 그렸다. 이건 나에 대한 저평가가 아니라 아주 객관적인 평가다. 수채화로 해바라기 꽃을 그리는데 바나나처럼 그렸다.


생각해 보니 고단한 삶을 사느라 자연의 꽃들이, 잎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눈여겨본 적이 없었다. 사시사철이 변하는 것도 무디게 느낄 정도로 자연에 무신경했다. 수채화는 꽃과 잎들을 주로 그리는데 관찰이 아니라 상상으로 그리니 더 엉망이었다.


나는 오기가 생겨 집에서 주야장천 연습하였다. 집에서 수채화 책도 사서 해봤지만 기본이 없으니 독학이 어려웠다. 정말 놀랄 정도로 실력이 늘지 않았다. 이런 실력으로 누구한테 선물하기도, 자원봉사를 나가는 일도 창피했다.


그래도 부족한 솜씨지만 복지관에 자원봉사 할 기회가 생겨서 용감하게 나갔다. 어르신들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였는데 부채에 글씨를 써드리는 봉사활동이었다.


어르신들은 내가 보기에는 잘 못 썼는데도 좋아해 주셨다. '선생님 써주세요.' 하시며 부채를 받아 들고 행복해하셨다.  덕담을 해주시는 어른들 덕에 자존감이 올라가고 뿌듯했다.

 

그날의 행사 중 한쪽 코너에 노래자랑하는 코너가 있었다. 신청자가 없다 보니 사회복지사님들이 흥을 돋우려 계속 계속 노래를 부르는데 힘들겠다 싶었다. 마침 부채 글씨도 끝마쳤길래 노래 신청을 하였다.


나는 용감하게 마이크를 들었다. 사차원 교육 주식회사 다닐 때 인기를 끌었던 곡 '얄미운 사랑'을 선곡했다.

 

나는 어차피 이곳은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알려질 일도 없는 장소이니 예전처럼 흥에 겨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의 모습이 웃겼던지 캘리 선생님들이랑 동료들은 너무 웃고 난리가 났다.  


나는 회사 다닐 때 회식에서 부르던 꺾기를 살려 1절을 불러 제꼈다. 트로트는 꺾어줘야 제맛이다. 그런데 1절을 부르고 2절을 부르는데 갑자기 확 하고 울음이 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순간 너무 당황했다.


'즐겁게 부르는데 왜 이러지?'


그 울음이 입 밖으로 나와서 터지게 생겼는 거다. 주저앉아서 엉엉 울게 생겼는 거다.


관객석을 보니 여전히 선생님들이랑 동료들은 깔깔 웃고 눈치를 못 챈 모양이다. 나는 가까스로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겨우 겨우 틀어막고 2절까지 간신히 끝마치고 내려왔다.


 '뭐지? 왜지?'


무대에서의 나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됐다.  집에 돌아와서도 내가 왜 그랬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 그 시절의 젊었던 그 순간. 노래 부르고 회식하고 놀았던 어렸던 나의 순수했던 그 시절의 그리움으로 확 하고 눈물이 차올랐던 것 같다. 그때보다 30년의 세월이 흐른 나의 모습이 뭔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다.  


이른바 나의 눈물은 '봉인 해제'의 신호탄이 된 것이다. 육아와 가정환경의 힘듦으로 억눌렸던 감정이 옛 노래를 부르며 '확'하고 올라온 것이다.


기쁨도 아니고 슬픔도 아닌 오묘한 감정이었다.


그날의 봉사 활동이 캘리그래피를 계속하게 된 원동력이다.  그래서 재능은 없지만 이 언저리에 계속 있기로 한 것이다. 실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좀 더디긴 하지만..  무엇보다 나의 캘리 스승님이 참 좋으신 분이라서 배우는 것이 즐겁다.


나는 평생 취미생활을 해 본 적이 없는데 해보니까 진짜 좋다.


 참 인생은 웃기다. 그냥 웃기다. 나의 계획으로 전혀 흐르지 않는다.


나는 캘리그래피를 배울 때 나의 한계를 설정하였다. 자유롭게 자원봉사활동을 다니는 것이었다. 돈 버는 능력은 없고 자원봉사에서 기쁨을 찾은 사람이니 그것만 해도 너무 신났다.


그런데 지역아동센터 자원봉사를 나갔다가 그곳 센터장님이 대형교회 장애우들 캘리 교육에 추천을 해주셨다. 이미 내정된 선생님이 있었지만  나를 좋게 보셨는지 추천만 해주신 것이다. 공교롭게도 내정된 실력파 선생님이 수업 일주일 전 못하시게 되었다.


강사로 서 본 적도 없지만 갑작스러운 제안에 운명적 이끌림으로 하게 되었다. 정말 어쩌다 우연히 발달장애인에게 캘리그래피를 가르치게 된 것이다.


살면서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어렸을 때 막연히 생각은 한 적이 있다. '나도 장애인들을 도우는 직업을 가질까?'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특별히 봉사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강의 첫날이 오기까지 제발 이 수업이 취소되게 해 주세요 기도했다. 너무 떨렸다. 그 전날까지도 먹은 게 계속 체했다.  수업 시뮬레이션을 수도 없이 하고 수업 준비도 한 보따리 해갔다. 2시간 30분을 어찌 채워야 할지 캄캄했다.


첫날 수업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되지도 않게 지껄인 것 같다. 잔뜩 해간 수업 준비는 반도 진행 시키지 못했다. 당황하고 서툴고 욕심이 많았다. 초보 티가 팍팍 났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발달장애 성인들을 처음 접하는데 전혀 어색하지 않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내가 서툴러도 나를 선생님으로 보고 잘 해내려 애썼다. 그 모습이 보였다. 금방 지루해 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나랑 잘 맞는다. 나도 지루 한 것은 싫어하기 때문에 색다른 재료를 제공하고 좋아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성취감이 느껴졌다. 스킨십도 어찌나 좋아하는지 항상 나를 안아준다. 6회기 수업이 너무너무 길게 느껴졌다. 한 회 한 회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것이 시작이 되어 그다음 해에 장애인복지관에 매주 캘리그래피 선생님으로 일 년 과정을 이끌고 있다. 6회기도 쩔쩔매던 내가 무려 40회가 넘는 강의를 맡게 된 것이다.


 나는 나의 한계 설정을 넘어 캘리그래피로 강의 수입이 생기게 됐다. 여기서는 나의 부족한 실력이 크게 구애를 받지 않는다.  강의시간에 그날의 주제로 즐겁게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게 도우면 된다.  처음에는 장애인의 특성을 모르고 수업 준비를 잔뜩 해갔다.  이것저것 다 알게 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욕심이었다. 한 가지 그림과 글씨를 천천히 즐겁게 마무리하면 된다. 나의 욕심을 덜어내니 편하다. 몇 개월째 만나는데 이들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시간이 다른 사람을 만날 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비록 발달이 느린 장애인이지만 배려심도 있고 도와주려고 한다. 나만 보면 이뻐졌다고 칭찬하고 안아준다. 그림책을 읽어주며 이야기도 나누는데 이해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의 개성이 참 재밌고 귀엽다. 지금은 작품 하나를 뚝딱 완성한다. 우리 반이 에이스 반이라서 그런가 한 명 한 명이 잘 소통되고 있다.


나는 지금 SJ대에서 사회복지 상담을 전공한다. 이것도 한계를 설정했다. '졸업장만 따자. 직업으론 어려워.'


나의 한계 설정이 되게 웃기다. 인생은 마음처럼 되지 않는다.


나의 다음 길은 어떻게 예정되어 있을까 너무 궁금하다. 오십이 넘어 비로소 내가 살고 싶은데로 살게 된 것이다.

  

이전 17화 바닥치고 올라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