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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Sep 01. 2024

바닥치고 올라갈까.

번아웃이 오다.

 나는 서울에 살 때 남편이 경제적으로 힘들게 했을 때, 재테크를 하려고 공부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흔네 살에 모든 게 없어지니 오히려 욕심이 없어졌다.  내가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구나 알게 됐다.


나는 가족의 행복에 집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지?' 생각했다. 돈을 벌 수도 늘릴 수도 없다. 그건 포기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정을 잘 건사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한 아이들이 잘 커가도록 몸이 부서져라 밥도 차리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했다.  가족이 여섯 명이면 하루의 빨래 양과 설거지 양이 많다. 방학 때는 어마어마하다. 한 끼라도 설거지가 쌓이면 양이 대단히 많다.


나의 시간은 없고 이렇게 열심히 키우고 희생하는데 사춘기 자녀들이 대들고 말을 안 듣고 속상하게 하니 견디기 힘들었다.  진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만큼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었다. 아이들한테 크게 기대한 건 없는데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건 나에겐 너무나 어려운 숙제였다.


나는 점점 웃음이 없어졌다. 행복하지도 않았다. 마음속에 왠지 모를 분노로 가족들이 조금만 건드려도 화가 났다.


잠깐이지만 학부모회장을 하며 바깥 활동을 하니 오히려 숨이 쉬어졌다.


날개 꺾인 나비는 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는 언제 바닥을 치고 올라갈 수 있을까.


서울에 살 때 아이들 교육면에서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양주에 이사 오면 나아지려나 기대했지만 여기서도 똑같았다. 나는 항상 어디에 살아도 장소만 바뀔 뿐 항상 바닥이었다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없다면 바닥에서 적응해야 한다.  나는 적응하기로 했다. 이런 삶에서.

 

학자들이 그런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쥐를 두고 울타리에 전기 충격을 주는 실험이다. 항상 그 울타리를 건너려면 전기 충격을 주는 거다. 쥐는 그 울타리를 넘어갈 때마다 전기 충격을 받으니 더 이상 울타리 근처에 가지 않는다.


나중에 전기 충격을 제거해도 쥐는 더 이상 울타리 너머의 세상을 가 볼 생각을 안 하게 된다.


내가 그 쥐가 된 것 같았다.  행복의 울타리를 건너려 할 때마다. 거듭된 좌절로 더 이상 그 너머의 행복을 찾지 않는.... 그런 쥐가 된 느낌....


나도 언젠간 바닥을 치고 올라갈 수 있을까?

내 생애 행복이 있기는 한 걸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을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먼저 나의 못된 소비습관을 점검해 보았다. 나는 숫자에 약하고 가정경제에 약하다. 지금도 그렇다. 물론 우리집 가정경제의 쓰나미를 몰고 온 어떤 일 때문이기도 하고, 자장면 집의 미숙한 운영의 결과라고 해도 이렇게 살아선 안된다.


나는 도서관에서 경제 재테크 관련 서적을 잔뜩 가져와 읽었다. 어차피 재테크할 돈도 없고 먹고살기 힘들지만 그냥 무작정 공부했다.  공부해 보니 나의 경제관념이 부족한 부분이 많았다. 세세하게 바꾸는 것은 어려웠지만 큰 틀에서 하나씩 바꿔나갔다.


파산 기간 동안 강제 신용카드 없는 생활을 했다. 신기하게도 신용카드를 없애니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신용카드를 없앤 것이 종잣돈 모으기에 제일 큰 역할을 했다. 딱 있는 돈만 쓰고 나머지는 다 모았다.


그러다 나에게도 기회라는 것이 왔다. 신혼부부 공공 분양에 당첨된 것이다. 우리는 신혼이 아닌데, 그 당시 자녀가 만 6세이면 혼인 기간 상관없이 청약 일순위 자격이 주어졌다. 막내가 8살 생일이 지나지 않아 만 6세였다.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나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다. 돈이 없어도 재테크, 분양등에 대해 공부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당첨이 되었지만 계약을 체결하는 날, 할까 말까 무척 망설였다. 나는 울타리 속의 쥐가 됐기 때문에 이런 좋은 기회를 잡아도 되나 망설였다. 파산했던 이력이 있어 담보대출이 될까 걱정했는데 파산 5년 후 정확하게 복원이 되었다. 바닥치고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새 아파트에 이삿짐을 들여놓을 때까지도 안심을 못했다. 다 이사하고 나서야 그제야 안도했다. 나는 새로 지은 아파트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헤아려보니 자장면집 폐업하고 딱 9년 만이다. 십 년이 되기 전에 우리가 한 땀 한 땀 모은 돈으로 입주를 한 것이다. 9년 전 폐업할 때는 전혀 예상치 못 한 일이었다. 막내가 태어났을 때 폐업했으니 입주할 때 열 살이다. 막내 덕분에 청약자격이 주어지고 당첨되고 입주한 것이다.


'드디어 내가 해냈구나.'


남편도 너무너무 좋아했다. 처음에는 평수가 작다고 투덜댔는데 막상 입주하니 제일 좋아한다. 남편이 고생 많이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 12시까지 배달하고 집에 와서 밥을 먹고 새벽 2시에나 잤다. 다음 날 또 매일매일 나갔다. 쉬는 날도 없이 일했다. 남편은 자장면집 운영하며 돈을 못 벌어다 준 것이 한이 됐는지 불철주야 일했다.  결혼 초창기부터 속은 썩였는데 플러스마이너스로 고마운 게 크다.


'사람의 거주지가 변하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 궤도가 변하는 것이다.'  나의 인생 궤도가 방향을 바꾼 것이다.


아이들이 좋은 곳에서 편안해하니 좋았다. 놀이터도 있고, 아파트 뒤에 산도 있다. 정말 좋다.


2023년도를 기점으로 나의 인생에 긍정적 변화가 생긴 것이다. 새 아파트에 입주했고, 캘리로 봉사활동도 많이 다녔다. 좋은 기회로 강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 좋은 때, 갑자기 나는 꼼짝할 수 없는 번아웃을 겪는다. 대인공포증처럼 그 누구도 만나기 어려웠다. 가정을 겨우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의 작은 한마디에도 상처받고 앓아누웠다.


이 좋은 때 나는 12월부터 심각한 동굴로 들어갔다. 만나는 모든 사람이 가시처럼 콕콕 박혔다. 무엇을 먹어도 누구를 만나도 행복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족도 귀찮게 느껴졌다.


'이제 살 만한데 왜 그러지?'  


내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제 남편도 가정밖에 모르고 첫째 둘째도 자리를 잡아간다. 새 집에 이사도 왔다. 강사라는 직업도 생겼다. 모든 게 완벽해지고 있었다. 집안은 더없이 평화로운데 나는 이상하리만치 우울의 늪에 빠졌다.


삶을 살 의지가 예전 고난의 시기보다 없어졌다.


 '병원을 가야 할까?'


아무도 아무것도 소용없는 것 같았다. 그저 침대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왜 그런지 생각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전쟁처럼 살았다. 전쟁을 대비하고 위기상황을 해결하는 특전사처럼 잘 헤쳐 나왔지만 평화시에 어떻게 지낼지 모른 것이다. 이런 평안한 시간이 오히려 불안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몸뚱이가 된 것이다.


올초에 캘리그래피 전시회를 하며 엄마, 아버지 글씨를 쓰다가 폭포수같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럴 바에는 글을 써보자 하여 올해 3월부터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여기까지 왔다. 남편이야기까지 나온 것이다.


글을 쓰고 놀랍도록 건강해졌다. 놀랍도록.. 그러니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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