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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력 Jul 16. 2024

엄마에게 집을 나가라고 했다.

공릉동

엄마가 나가기 전까지 살았던 공릉동 집이 아직 기억이 선명하다. 공릉동 집은 마당 한 개, 화장실 한 개를 세 가구의 집이 공동으로 사용했다.


공릉동 우리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이 있고 몇 자국 걸어 들어가면 작은 마당이 있다.


그때는 거의 단칸방에서 생활했다. 마당 왼쪽방에는 중년부부가 살았는데 사이가 좋았다. 방문을 열고 뭐 좀 물어보려 하면 두 분이 항상 이불을 덮고 있었다. 뭐 하는지 항상 그랬다. 나중에는 문을 여는 것을 조심했다.

     

우리 집은 제일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방 하나 부엌 하나, 그리고 우리 집 오른쪽에 또 누가 세 들어 살았다.


이 집에서의 기억은 좋았던 기억보다 슬프고 무서웠던 기억이 많다.


아버지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폐인 생활을 하던 시기였고 틈만 나면 엄마를 때렸다.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고 했던 곳도 이 집이다.


엄마는 김치를 담그다가도 아버지에게 맞았다. 마당 한가운데 고무대야에 김치가 그대로 소금에 절여진 채로 우리 집 부엌에서는 아버지가 엄마를 죽일 듯이 때렸다.


나는 너무너무 무섭고 공포스러웠다. 내가 다섯여섯 살 때는 공포에 벌벌 떨고 아무것도 못했지만,  여기서는 아버지 몰래 밖에 나가서 집 나간 큰오빠한테 도와 달라고 울면서 전화하기도 하고, 우리 엄마 살려 달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큰오빠도 어렸는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아무도 아무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예전에는 가정폭력을 가정의 문제로만 치부했던 시대라 주변에 도움은 그때뿐이었다. 그저 아버지의 미친 짓(?)이 빨리 끝나기만 기다렸다.


모든 전쟁이 끝난 뒤에 우리 가정의 모습은 처참했다. 엄마는 온몸이 상처투성이로 널브러져 있고, 원흉 아버지는  술을 사러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폭력의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엄마가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라는 갖가지 이유를 갖다 댔다.


이런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엄마의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봐야 했다.


어느 날은 정말 엄마가 '오늘'죽겠구나 생각했다.


바로 '오늘 엄마가 죽는 모습을 보겠구나.' 싶을 정도로 심하게 때렸다.


엄마는 보따리를 몇 번이나 쌌다. 아버지 몰래 보자기에 옷 몇 가지를 넣어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때쯤 다시 들어왔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와서 엄마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면 '아. 엄마가 집을 나갔구나.' 생각했다. 나는 항상 마음에 각오를 하고 있었다. '엄마가 집을 나갈 수도 있다.' 그렇게 맞는데 누군들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을까.


 저녁때 엄마가 집에 돌아오면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아. 엄마가 오늘은 들어왔네.' 생각했다. 나는 엄마의  그런 의도를 알면서도 항상 눈치채지 못하는 척했다.  


 나는 항상 마음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엄마가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엄마는 몇 번이나 다시 이 지옥의 호랑이 굴로 들어왔다.


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엄마는 나를 참 예뻐했다.  막내인 나를 작은오빠가 질투할 정도로 예뻐했다. 이 집에서 엄마는 정이 떨어졌을 텐데 못 나가는 이유가 있다면 바로 '나'인 것이다.


나는 어느 날 엄마가 죽기 직전까지 맞은 날 결심했다. 내 눈앞에서 엄마가 아버지에게 맞아 죽는 것을 보는 것보다 엄마가 자유롭게 어딘가에서 살아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엄마를 너무너무 사랑하고 엄마 없으면 살 수 없는 아이지만 엄마가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엄마가 아버지에게 죽도록 많이 맞은 날 나는 엄마에게 울부짖으며 말했다.


"엄마 여기서 나가. 엄마 여기서 살면 죽어. 내 걱정은 하나도 하지 마. 엄마가 살았으면 좋겠어."


엄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며칠 후 엄마는 진짜로 나갈 결심을 했다. 큰 가방에 짐을 싸고 그날은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내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엄마가 나를 데려가려나?' 생각했다.


그 당시는 이혼도 흠이고 여자 혼자 아이를 데리고 사는 것도 힘든 시대였다.


내 나이 아홉 살 그날, 엄마는 지옥 같은 집을 벗어나 내 손을 잡고 택시를 잡았다. 엄마와 짐과 내가 택시 뒷좌석에 탔다. 엄마는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용산역으로 가주세요"


엄마와 나는 택시를 타고 용산역으로 갔다. 큰 가방을 든 여자와 아이가 택시 기사님이 보기에도, 누가 보기에도 이상했을 터였다. 엄마는 택시 기사님께 우리 사정을 말했다.  


나는 생각했다. '왜 쓸데없이 모르는 택시 기사님께 우리의 사정을 말하지?'엄마가 이제부터 사람을 조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용산역에 내렸다. 엄마의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고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갔다. 엄마는 다른 곳에 가지 않고 용산역 근처에 여관을 잡았다.


어디로 가지 않고 여관을 잡는 게 의아했다. 우리는 짐을 풀고 근처 식당을 찾아 저녁을 먹었다.


우리 집이 아니라 낯선 여관에 엄마와 있는 것이 이상했다. 여관 이불을 덮고 자려고 누워서 '엄마는 어디로 가려는 걸까?' 생각했다. 단칸방 우리 집이 아닌 곳에서 자는 게 불안했다.


다음날 엄마와 나는 여관에서 나왔다. 엄마는 또 택시를 잡았다. 엄마는 목적지를 말했다.


"공릉동으로 가주세요."


'공릉동? 왜 공릉동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엄마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아버지에게 들킬세라 집으로 나를 들여보냈다. 엄마는 들어오지 않고 나만 들여보낸 것이다.


집에 덩그러니 나만 남았다. 다행히 아버지는 없었다.   


그렇게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나는 엄마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정말로 오랫동안...


엄마는 왜 처음에는 나를 데리고 나갔다가 여관에서 자고 다시 집에 데려다 놨을까. 아직도 미스터리다.  아마 중간에 마음이 바뀌신 것으로 추측을 해 본다.


세월이 참 빠르다. 지금 내 나이는 그때의 엄마 나이를 훌쩍 뛰어넘었다. 그런데도 어제 일처럼 그때가 떠오른다.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잊고 잊던 사실들이 떠올려지기도 한다.


나는 엄마가 어딘가에서 잘 살기를 바랐다. 새로 살림을 차려도 되고, 나를 찾지 않아도 되니까 어딘가에서 건강하게 잘 살기를 간절히 바랐다. 나의 그리움보다 엄마의 생존이 중요했다.


항상 두 가지 생각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엄마를 울면서 붙잡아야 했을까?'

'엄마를 위한 선택이, 어린 나에겐 제일 나쁜 선택이었을까?'


나는 이제 온몸으로 경험하였다. 엄마 없는 삶을.


엄마 없는 삶은 밥을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픈 것이다.  웃고 즐거울 때도 항상 한쪽 마음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다. 상장을 타 와도 공부를 잘해도 기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곤경에 빠지고 부당한 일을 겪을 때 진심으로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나는 엄마가 나간 후로 밥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항상 배고팠다. 나중에 그것이 정서적 '허기'라는 것을 알았다.


오십이 넘어서 잊은 줄 알았고 극복한 줄 알았던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나는 아직 아기다. 아홉 살 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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